[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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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천상병

세상에는 행복한 걱정거리도 다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거늘 저승에 갈 여비까지 걱정하다니? 그러나 이 두 줄의 시구의 앞에는 많고많은 시인들 가운데 천상병만이 내지를 수 있는 아픈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백이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는 '70년 추석에'라는 부제가 붙은 시 '소릉조'의 뒤에 오는 역설의 극치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귀국, 마산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6.25 전쟁 중에는 미군 통역관으로도 일을 한다.

51년 전시 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대에 입학했으며 이때부터 시동인지 '처녀'를 함께 하면서 시 쓰기에 몰두, 52년에는 '문예'지에 '강물'과 '갈매기'로 유치환과 모윤숙의 추천을 완료했고 이어 53년에는 다시 '문예'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와 '사실(寫實)의 한계'가 조연현에 의해 추천완료되어 50년대의 머리맡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와 평론을 한 손에 움켜쥐는 특유의 저력을 내뿜는다.

64년에는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들어가 한 2년간 월급쟁이가 되기도 했으나 그의 멍에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천성은 앞서갈 수 있는 학력과 뛰어난 글재주가 있음에도 헐벗고 떠다니는 길을 택했다.

한참 후배인 나도 그의 수금처가 되어 거의 정기적인 내방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은 찾아왔다가 내가 자리에 없으니까 책상 위에 놓인 김소운 수필집 '하늘 끝에 살아도'를 들고 갔더란다. 헌책방에 넘길 양으로 들고나갔던 것을 첫 장을 읽다가 그만 오전 2시까지 독파했노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맨입으로만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잡지도 그러했겠지만 내가 '한국문학'을 할 때는 그의 원고은행이 되어있었다. 청탁하지도 않은 시를 원고지도 아닌 백지에 여러 편을 써다놓고는 실리지도 않은 시의 원고료를 받아가는 것이다.

관훈미술관 3층에 편집실이 있을 때 그는 종로예식장에서부터 인사동 바닥이 다 들리게 쩌렁쩌렁한 소리로 "이근배씨!"를 불러댔고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원고료 내라는 불호령에 편집부 여기자들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문단 선후배를 떠나 그와 나는 막역지우가 되고 있었는데 예의 그 정신병원에 들어가 행방불명이 되어야 했던 까닭을 가까운 친구들이나 부인도 아닌 내게만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의 모든 기록에는 "행려병자로 쓰러져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으로 되어 있지만 내게 들려준 이야기에 진실이 들어있다.

천상병은 부산에 가면 그동안 밀린 수금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내려갔단다. 거기서 여비는커녕 밥도 못 얻어먹고 서울행 완행열차를 무임승차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왜관에서 내렸더란다.

왜관에서 구상 시인의 부인이 병원을 하고 있다는 정보 하나만 믿고 한밤중에 내렸으나 남대문에서 김씨 찾기더란다. 헤매다가 다시 무임승차, 통금이 해제된 뒤 서울역에 내려 밥 줄 곳을 생각해낸 것이 돈암동 김구용 시인 댁이더란다.

터벅터벅 시간 반 남짓 걸어서 삼선교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 자전거를 내려주셨더란다. 마악 올라타고 페달을 밟는데 "저 놈 잡아라!"는 소리와 함께 우악스런 사내의 손이 등덜미를 낚아채더란다.

꼼짝없이 성북경찰서로 끌려가서 절도죄로 콩밥을 먹게 되었는데 조서를 꾸미던 형사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택시에 태워 정신병원에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뒤에 '하느님의 자전거'라는 시를 썼거니와 천상병이 93년 4월 저승길을 떠날 때 모인 부의금 8백만원을 장모가 의정부 수락산 밑 쓰러져가는 집 아궁이에 숨겨둔 것을 부인 목순옥씨가 빈방에 불이나 때주자고 불을 피워 재가 되어버렸다.

은행에서 재가 된 돈의 반액만 내어주니 재가 된 반은 천상병의 저승 가는 여비였고 반의 금액은 그가 걱정하던 장모의 장례비로 남겨둔 것이라나? 이승에서는 못 가져본 여비, 저승갈 때 흠뻑 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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