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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황식 "북한, 작년 12월 공격 준비 정황있었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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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식(65·사진) 총리는 스스로 욕심이 없다고 한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여러 번 러브콜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했다. 일례로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마땅한 주자를 찾지 못했던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김 총리는 단호하게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2010년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선 “총리를 잘한 뒤 대통령 출마 제안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선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에게 사심이 없다는 건 큰 무기였다. 그래서 2년5개월 동안 국정을 소신 있게 운영할 수 있었다.

 김 총리는 “난 존재감이 없는 게 목표”라며 늘 스스로를 낮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존재감은 더해갔다. 겸손하되 강단이 있는 외유내강형인 셈이다. 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주통합당 김동철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며 거센 정치공세를 펼치자 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쳐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 모든 게 그를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 총리’로 만든 비결이다.

 퇴임을 앞둔 김 총리를 15일 오후 중앙SUNDAY가 만났다.

김 총리의 15일 일정은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시작으로 꽉 차있었다. 오후 6시 10분 인터뷰 직후엔 재외공관장과의 만찬장으로 황급히 자리를 옮겨야 할 정도였다. 총리실이 세종시로 옮겨간 뒤에 동선은 더욱 길어지고 늘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총리실 관계자는 “22일이 돼야 이삿짐을 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점잖지만 정치권의 무차별 공격을 받으면 강단 있게 맞받아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제 공론의 장이든, 사적 모임이든 모든 게 합리적으로 논의됐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선 언제부터 자기 주장과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 사실관계도 부정확하게 악용한다.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쓰기도 한다. 특히 정치권에서 많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상대방이 입을 상처나 타격을 배려하면서 (사안을) 논의하는 게 국가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

-턱없는 공격을 받을 때 어떻게 대응하나.
“그럴 때 흥분해서 이성을 잃으면 곧 나한테 마이너스다. 참고, 자제한다. 마음으로 컨트롤하는 편이지만 때론 화도 나고 서운한 점을 내보일 필요는 있겠다는 순간이 있다. 실제로 화가 나서 한다기보다도 이 부분에서 단호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겠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진짜 화난 경우가 있었나.
“(14일 국회에서 설전을 벌인) 김동철 의원은 내가 좋아하는 학교 후배(광주일고·서울대 법대)다. 아까도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서로 공적인 입장에서 한 것이다. 그 때문에 김 의원과 내가 인간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얘기해줬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저렇게 하는 게 이해될 때도 있다.”

-그래도 화가 많이 날 경우가 있을 텐데.
“있다. 그래도 대부분 다 이해한다. 정치인 입장에서, 반대자 입장에서 그런 발언이나 행동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섭섭하지 않다. 그런데 가끔 가다 ‘인간적으로 못된 사람이다’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

-누군지 궁금하다.
“(손을 내저으며) 그런 건 말하면 안 되지. 물론 김동철 의원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두세 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있나.
“허허. 좋은 분들은 너무 많다.”

-몇 명만 이름을 든다면.
“이름을 다 거론하면 몰라도 몇 명만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섭섭해할 것 아닌가.”
총리실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 총리는 의외로 ‘전투력’이 세다. 그는 국회에 출석할 땐 물을 조금만 마신다.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우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김황식 총리가 15일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뒤 홀가분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떠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이명박 대통령과 조금 드라이한 관계”

김 총리는 2010년 10월 취임했다. 정운찬 총리의 사퇴, 김태호 총리 후보자의 낙마로 마땅한 총리감을 찾지 못한 이 대통령이 당시 감사원장이었던 그를 ‘삼고초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장에서 총리로 옮겨오게 된 건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었나.
“이 대통령하고는 감사원장이 될 때까지 인연이 없었다. 먼발치에선 봤지만 개인적으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왜 대통령이 나를 감사원장으로, 또 총리로 발탁했는지 모른다. 대통령도 지금까지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진 않았다. 나도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대통령한테 물어볼 수도 없지 않나. 총리에서 물러나면 한 번 허심탄회하게 물어보려고 그런다.(웃음)”

-대통령과 의견 충돌을 한 적이 있나.
“그런 일은 없었다. 비교적 생각이나 철학, 기본 정책의 방향에 대해선 대통령과 많이 일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법과 원칙을 내세우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수긍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이거나, 정치공학적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대통령과 부딪칠 일이 없었다.”

-매번 똑같을 순 없지 않은가.
“‘나하고 생각이 다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은 받은 적이 있다. 사소한 정책들이었다.”

-예를 들면.
“그런데 내 짐작이니 무엇이라고 특정을 할 순 없다.”

-그럴 경우 어떻게 했나.
“나름대로 내 입장에서는 설득을 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말을 하거나 내 뜻을 계속해서 밝혔다. 대통령이 거의 다 받아들여줬다. 내 의견을 존중해줬다.”

-대통령과 사적 만남이 없었다면 이너서클에서 소외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법관 출신이고 감사원장을 했던 사람이니 원칙과 상식, 행동 양식을 굉장히 존중해 주고 보호해 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나도 개인적인 얘기를 안 하고, 대통령도 사적 요소가 개입될 만한 건 말씀을 안 한다.”

-책임 총리보다 더 강한 게 분권형 총리인데, 한국 현실에서 필요하다고 보나.
“운영의 묘를 살려서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불안정하다. 개인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 각국을 다녀보면 대통령과 총리 있는 곳에서 나름대로 상당 부분 역할 분담이 돼 있다. 우리도 제도의 틀로 검토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34년간의 법관 경험이 총리직 수행에 얼마나 도움이 됐나.
“행정도 결국은 법 집행이기 때문에 법을 많이 알고 적용해서 판단하는 게 총리직을 수행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다만 행정 경험이 부족한 게 약점이 될 수 있다. 결국 법조인이 총리가 되는 게 옳으냐 그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자질을 갖췄느냐가 문제다.”

-역대 총리 가운데 롤 모델이 있다면.
“그분들이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지만, 굳이 얘기한다면 고건 전 총리다. 다양한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인품 있게, 품격 있게 총리직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연평도 포격 사건 대응 과정에서 우왕좌왕했다는 평가가 있다.
“연평도 포격 때 정부는 도발에 대해선 강한 응징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런 자세를 보인 뒤 별다른 도발이 없지 않은가. 지난해 12월 애기봉 크리스마스 트리 점화를 앞두고 북한에서 ‘좌시하지 않겠다’ ‘공격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로 도발을 준비하는 정황들도 포착됐다. 지난해 12월 21일 오후 5시 점등이 예정됐을 때 나는 청와대에서 여러 장관들과 만찬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북한이 공격하는 것 같은 조짐을 보인다고 취소하면 안되지 않느냐’며 내 의견을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다. 만일 포기하면 사사건건 북한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북한이 도발을 못할 것인데, 만약 한다면 그보다 더한 응징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점등 행사를 그대로 진행한 것이다.”
대법관 출신인 김 총리는 ‘법치주의자’로 불린다. 법치주의에 대한 강한 소신 때문이다. 외부 강연을 통해 자주 “법을 통한 정의 실현 과정에서 다른 요소가 개입하면 혼란스러워진다”고 강조해왔다.

-평소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법치와 사회적 자본을 강조했다. 박근혜 당선인도 통합을 내세우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사회 통합이 되려면 사회 질서가 유지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과 원칙, 상식이 통하는 것이다. 법이 엄정하게 집행돼야 한다. 다른 한편으론 그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불만이 있는 국민과 다른 차원에서 충분히 소통하고 설득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용산 사태, 쌍용차·한진중 문제가 잘 해결됐다고 보는가.
“법과 원칙에 따라 결론을 내야 하는 문제인데, 철거민과 근로자 입장에선 그런 결과에 승복할 순 없지 않나. 그러니까 자꾸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 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딜레마다. 우선은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다만 그들을 내쳐버리지 말고 꾸준하게 대화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안이 마련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부의 노력이 전달돼야 한다.”

-현 정부는 원칙을 지키면서 소통을 했나.
“원칙에 벗어나는 행태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그들을 배려하려는 노력은 솔직히 부족했다.”

-현 정부의 ‘고소영’ ‘강부자’ 같은 편파 인사, 친기업 정책, 고환율 정책 때문에 갈등이 촉발되거나 증폭된 측면도 있다.
“고소영·강부자·고환율·친기업이라고 하는데. 그건 내가 총리를 맡기 전에 나온 지적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통령하고도 많은 논의를 했다. 대통령의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란 게 대기업 프렌들리가 아니다. 모든 기업을 활발하게 활성화시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고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이었다. 대통령도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을 강조했다.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하고는 안 맞는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환율 정책이라는 게 어느 정도 국가가 관여해 컨트롤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환 시장과 경제 상황에 따라 정해진다. 정부가 꼭 고환율 정책을 썼다고 이야기하는 건 부분적으로는 맞지 않다. 고소영·강부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분적으로 상당한 오해가 있었다. 내가 총리로 취임한 뒤 이와 같은 지적들이 많이 희석됐다.”

-총리께선 법관 생활을 34년간 했다. 국민들은 ‘법원 문턱은 높고 판사들은 고압적’이라고 생각한다. 법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부분의 법관들은 성실하고 청렴하다. 좋은 결론을 내고 있다. 일부 몇몇 미숙한 사람들 때문에 법원 전체가 불신을 받는다.”

-개인 윤리 문제이기 때문에 사법부 개혁이 필요없다는 뜻인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제도를 바꿔야 한다.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법관 시절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차장을 맡으면서 사법부 개혁에 관여했다. 원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보나.
“솔직히 법원도 많이 달라졌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발전했는데, 거기에 호흡을 맞춰서 법원이 못 따라가면 굉장한 지탄을 받게 될 거다. 국민이 예전에는 법원에 섭섭한 의견을 표출하지 못했다. 지금은 언론과 국민으로부터 감시의 눈이 훨씬 커졌다. 그래서 법원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요즘 법원은 (옛날에 비해) 훨씬 발전하고 향상됐다.”

-전관예우 문제는 여전하지 않은가.
“전관예우가 허용돼서는 안 된다. 예전에는 전관예우가 상당히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 전관예우와 관련해 법원에서는 억울하게 생각한다. 전관예우는 법원의 이해(利害)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연 문화를 법률 수요자들이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들어 전관예우가 많이 희석됐다.”
 
“어머니 영향 가장 많이 받았다”
김 총리는 2004년 광주지법원장 시절 매주 전 직원에게 보낸 e메일을 엮어 ?지산통신?을 펴냈다. 지산은 광주지법의 주소지(광주광역시 지산2동)다. 그는 ‘어머니, 우리의 스승’이란 이 책의 글에서 “나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고 적었다.

-어릴 때 집안교육은 어땠나.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좀 엄정하고 어머니는 자애로운 분이셨다. 가정교육은 스스로 잘 받고 컸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는 철저하게 배웠다.”

-기억에 남는 부모의 가르침은.
“누구하고 다툼이 생길 때 상대방이 나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면 싸우지 말고 양보하라고 배웠다. 그러나 강자이거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다퉈서 이기라고 하셨다. 우리 집이 웬만큼 살다 보니 일가 친척들이 늘 들락거렸다. 좀 불편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하면 어머니가 혼을 냈다. ‘손님이 오면 좋은 집안이 되니 복으로 알아라’고 하셨다.”

-중학교 때부터 광주로 갔으면 부모와 일찍부터 떨어져 살았는데.
“부모님이 원래 광주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장성으로 귀향하셨다. 내가 떨어져 하숙하고, 자취하며 살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도 버스로 1시간 거리(20여㎞)니까 주말에 집에 가고, 학교 방학 때는 한 달 넘게 머물렀다. 부모님한테 가정교육은 계속해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취하며 밥은 언제 처음 지어봤나.
“늘 하숙하거나 누나들과 함께 자취했다. 그래서 밥을 지어본 적이 없다. 1978년 서른 살에 독일 유학을 갔을 때 등산을 가서 밥을 지어봤다.”(이 대목에서 그는 계면쩍게 웃었다.)

-평생의 좌우명이 있다면.
“온유하고, 겸손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해왔다.”

대담=이양수 중앙SUNDAY 편집국장 정리=이철재·백일현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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