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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 21년〉(2)모두 얼마나 변했을까? | 예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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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묘지 공원이란 말이 한창 유행이다. 이제까지 산에다 봉을 만들던 「뫼」가 아닌 이른바 현대화한 「유택」을 평면으로 짓되 그곳에 잔디를 깔고 꽃을 심어 공원으로 쓰자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들었으면 기절할 노릇이다. 이미 인천에서는 저승의 「아파트」라고도 할 납골당까지 만들었다. 해방 당시만 해도 법도를 찾는 시골에서는 상투를 올렸다. 성년식인 관례를 치르지 않은 총각은 백살이 되어도 아이. 어른들 축에 끼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남녀 할 것 없이 어른 아이의 구별이 없다. 『고지서 왔어요』-사동이 결혼 청첩장을 내어 밀면서 하는 소리다. 모군과 모양이 모일 모처에서 혼례를 이룬다는 청첩장이 어느새 세금 바치는 고지서로 통할 정도로 신식이 됐고 기계화하였다. 그리고 그 결혼은 사배아닌 일배의 상견례로 거뜬한 어른(?)을 만들고 만다. 좀 비약이긴 하지만 산정에서 기상에서 그리고 「텔레비젼」을 통한 혼인 구경을 했으니 머지 않아 수중·우주 혼례도 등장할 듯.
「5촌 오빠」라는 말이 한동안 여대생들간에 유행했다. 애인을 숨기려는 익살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요사이 시당 고모니 재종질이니 하는 촌수를 제대로 따지는 이는 극히 드물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해서 「아버지」「어머니」「오빠」「언니」가 고작. 그것이 결혼을 하면 「나」와 「그이」 그리고 「아들·딸」로 변해 버린다. 시부모 특히 시어머니에 대해서는 인기가 없다. Y대를 갓나온 L양은 결혼 상대자 선택의 첫 조건에 『장자가 아닐 것』을 내세웠다.
장자라 하더라도 결혼 후 시부모를 모시지 않는다는 실질적인 증명이 있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맏며느리가 되면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그에 따라 시누이·시동생을 돌봐야 하니 언제 남편과 생활하고 「엔조이」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근대화(?)한 설명.
『시어머니 다른데 없다』는 옛말은 있지만 요사이는 오히려 신식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눈치를 살피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가계를 맡은 아들이 그 월급 봉투의 집행권을 며느리에게 주어 빼앗기니 어디 시어머니가 힘을 쓸 수 있느냐고 혀를 차는 할머니. 시부모들 중엔 아예 부부 단위 소가족을 권장하는 이도 많다.
고부가 한 집안에 모여 살면 피차가 「시집살이」라는 것. 혼수에 못지 않게 결혼 준비로 살 곳, 즉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큰일로 등장했다. 혼례가 끝나면 신혼 아닌 신혼여행을 떠나 버린다. 이래서 층층시하의 대가족제는 무너져 버리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예식장이란 원자로에서 쉴새없이 분열, 도시의 주택난까지 가중시키고 만다.
초저녁 제사를 한사코 반대하는 할머니는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귀신은 초저녁에는 오시지 않아-』그러나 도시민들 중 많은 사람이 초저녁∼8시에 기제사를 모신다.
제사를 모신 뒤 제각기 통금 시간 전에 제집으로 돌아가 이튿날의 일에 지장이 없게 하겠다는 데서 일어난 전후파적인 제례의 변천, 결국 도시의 통금이 신의 강림「다이어」를 변경시킨 것이다. 그리고 5대봉, 4대봉 하던 대가족 제례도 아버지, 할아버지로 그 범위가 줄어들고 농지개혁을 거친 뒤 종가의 재정이 사실상 무너졌으니 「무전이면 불제」란 예절이 그대로 실행됐다고나 할 수밖에.
안경을 쓴 젊은이들이 거리에 많다. 안경을 어른 앞에서 썼다가 경을 친 눈 나쁜 어른들도 자기 앞에 버젓이 색안경을 쓰고 나타나는 아들에게도 무관심, 좀 완고하면『요사이 젊은것들이란…』하는 것으로 그친다. 인사도 특별한 경우 이외는 머리만 약간 숙인다. 거기에 악수라는 편리한 예법이 크게 통용되고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전근대적이라는 사고방식을 갖는 20대까지 등장한다.
어쨌든 자기 분수에 알맞게 예절을 지키자는 것 그러면서도 이것이 「우리의 예절」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예절」이라는 민속학자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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