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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 英유학보낸 개인파산 기업가, 알고보니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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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파산(Bankruptcy)은 채무자가 경제적으로 파탄상태에 빠졌을 때 그 총재산으로 총채권자에게 공평한 만족을 주는 재판상의 절차다. 10여 년 전부터인가 법원에서는 법인파산보다 개인파산을 다루는 일이 잦아졌다.

파산 재판을 살펴보면 한쪽에서는 빚을 갚으라고 판결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빚을 탕감해주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이 많을 법하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즉 일단 맺어진 계약은 준수돼야 한다는 법원칙에 안 맞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서울지방법원 파산부에 근무하던 시절 경험했던 사건들을 소개한다.

중소기업 경영자인 A씨는 IMF 외환위기 당시 거래처들의 연쇄부도를 못 견디고 부도를 냈다. 대표이사 개인도 연대보증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회사 빚이 모두 대표이사인 A씨의 개인 빚이 됐다. 살던 집까지 경매로 넘어가고 친척 집을 전전하던 중 개인파산신청을 했다.

그런데 기록을 보니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 되는 세 자녀가 있길래 심문 도중 자녀들은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를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런던에서 음악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답하는 것 아닌가.

역시 흔히 말하듯 사업은 망해도 사업가는 잘살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남의 빚은 못 갚는 분이 무슨 돈으로 자녀들은 해외유학을 시키고 있나요?” 어눌한 대답이 돌아왔다. “애들이 장학금도 받고요, 애 엄마가 그곳에서 식당 일도 하고….” 글쎄, 그렇게 쉽게 처자식을 영국으로 유학을 보낼 수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 누군들 안 보낼까 싶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A씨의 어린 세 딸들은 세계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했던 음악 영재들로, 학비와 기본 생활비를 충당할 만한 금액의 영국정부장학금 등을 받고 있었다. 주말이면 교회에서 반주자로 일하며 생활비도 보태고 있었다. 아이들 엄마는 식당에서 월 100만원 정도 받으면서 일하고 있고, 사는 집도 허름한 월세집이었다. 서울에 홀로 남아있는 아버지가 재산을 숨기거나 처자식에게 돈을 보낸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얼마 후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B씨는 한동안 택시기사로 일하다 그만두고, 실업자 생활을 한 지 오래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록을 뒤지다 보니 신용카드 내역서에 ‘OO’ ‘**’ 등 야릇한 상호가 자주 나오는 것이었다. 남의 빚은 안 갚는 주제에 술집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니!

그런데 심문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는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하고 병색이 완연한 병자의 모습이었다. 중증 호흡기질환 장애인이며, 말하는 것도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했다. 방탕한 생활은커녕 일상적인 생활도 어려워 보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택시기사로 일하며 살아가던 B씨는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급성 호흡기 질환으로 대수술을 수차례 받고, 1년 가까이 병원에 장기 입원해야 했다. 그를 돌봐줄 친지도 없어 간병인까지 둬야 했다. 수천만 원이 훌쩍 넘어가버린 병원비 등은 온갖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메울 수밖에 없었다.

퇴원 후에도 살길은 막막했지만, 막연히 카드대금이 연체돼 신용불량자가 되면 큰일난다는 생각에 또 다른 카드를 발급받아 앞의 카드대금을 메우는 돌려막기를 반복하다 보니 고액의 카드수수료와 연체이자로 빚이 두 배로 늘어나버렸다.

카드 결제대금이 부족해지자 그는 예전 동료인 택시회사 노조원들에게 조합원 회식 등으로 단란주점에 갈 때 자기 신용카드로 계산하고 결제일에 돈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사적으로 ‘카드깡’을 한 셈. 결국 밑 빠진 독에 물은 채울 수 없게 마련이었다. 예정된 파국이 찾아와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카드대금 고지서를 해결할 수 없게 됐고, 신용불량자 낙인은 물론 채권추심원들의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파산신청을 한 것이다.

안타깝고 화가 났다. 방탕한 생활은커녕 빚의 반은 병원비, 나머지 반은 온갖 연체이자로, 결국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돈을 갚느라 심신이 황폐해진 채 비로소 법원을 찾은 이 답답한 양반에게. 그리고 그 지경인 사람에게 밑도 끝도 없이 신용카드를 발급해준 카드회사들에.

답답한 사람은 또 있었다. C씨는 학원강사로 일하던 여성이다. 결혼했고, 어린 아들도 있다. 학원강사 수입으로 넉넉지는 못해도 가족이 먹고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 보이는데, 왜 파산부를 찾게 됐을까.

C씨의 빚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C씨만큼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이상하게도 식당이고 뭐고 먹고 살아보려고 시작만 하면 망하곤 하는 친언니를 위해 C씨는 빚보증도 여러 건 서주고, 돈도 줬다. 그러다 결국 자기도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신세가 되고도 또 현금서비스를 받아 언니에게 건네줬다. C씨에게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대책 없이 언니를 위해 빚을 졌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단둘이 자란 친자매라서, 도저히 살아보려고 애쓰는 언니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너무 힘들어 모질게 맘을 먹어 보아도, 늙으신 어머니가 언니를 이번 한번만 더 도와 주라며 눈물을 보이면 견딜 수 없어 마지막이라고 되뇌며 카드를 긁었다.”

어렵고 힘든 것은 빚진 사람들만이 아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D씨는 자수성가해 가구공장을 경영했다. IMF 당시 부도를 냈다가 힘들게 재기해 어렵게 공장을 운영하다가 불의의 화재로 공장과 재고가구가 모두 불타 수억 원의 피해를 입고는 좌절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그를 안타깝게 여긴 거래업체들은 대부분 그의 재기를 빌어주며 빚을 탕감해줬다. 그래도 남은 금융기관 빚을 감당할 수 없어 파산신청을 했다. 그런데 정작 금융기관들은 아무런 이의 신청도 없는데 소액채권자인 자재대금 300만원을 못 받은 E씨가 강하게 면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게다가 E씨는 화재 전까지 D씨와 형님아우하며 지내던 사이였다는데 말이다. E씨가 주장하는 이의 사유들은 법적으로는 면책불허가 사유가 될 만한 것들이 아니었으므로 간단히 배척하면 그만인 듯도 했다.

그러나 화재로 알거지가 된 사람도 억울하지만, 돈을 떼이는 사람도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에 쌍방을 모두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씨의 말은 이랬다. D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은 안타깝다.

하지만 사고 이후에 좀처럼 연락도 없다가 면책신청을 했다기에 연락해서 그런 신청을 하려면 미리 상의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야박하다며 되려 화를 내기에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됐고, 감정이 많이 상해 이의신청을 하게 됐다.

이번에는 D씨의 말을 들었다. 화재 이후 좌절해 있다가, 살아보려고 고시원 생활에 부부가 일용직을 전전하며 재기해보려고 발버둥을 치느라 미처 E씨의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D씨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면책을 받게 되면 법적으로는 E씨를 비롯한 거래업체 사람들의 빚을 안 갚아도 됩니다. 하지만 E씨를 비롯한 거래업체 사람들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인데, 그 마음의 빚도 안 갚고 살 수 있겠습니까?”

D씨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면책이 아니라 무슨 결정을 받던,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아주 적은 돈이라도 벌게 되면 제가 피해를 끼친 분들께 갚으며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D씨의 그 말이 겉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는지, E씨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이의신청을 취하하겠다며 D씨의 재기를 빌어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감정표현이 서투른 40대 후반의 이 두 아저씨는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계면쩍어 서로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했다.

파산한 회사는 청산한 후 소멸시킨다. 하지만, 파산한 ‘사람’은 다시 살아야 한다.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채무자의 살 1파운드를 베어낼 수는 없는 이상, 채권도 무제한 행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필자가 배운 것이다.

문유석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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