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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박근혜의 계영배 교보생명의 기우뚱 향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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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러스트=강일구

교보생명의 서울 광화문 본사 3층 임원회의실 한편에 향로 두 개가 놓여 있다. 받침대 위의 두 향로 중 하나는 똑같은 발이 세 개 달려 있고, 다른 향로의 세 발은 길이가 제각각이다. 당연히 이 향로는 한쪽으로 쓰러질 듯 기울어져 있다. 받침대에는 ‘향로의 세 발 높이가 같아야 안정을 유지할 수 있듯이, 고객·임직원·투자자 등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기업도 안정 속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함께 놓여 있다. 향로는 신창재(60) 교보생명 회장의 지시로 지난해 8월 설치됐다.

 신 회장은 최인호 작가의 소설 『상도』에 나오는 솥[鼎]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해당사자들을 균형 있게 배려해 지속가능한 경영을 도모하자는 철학이다. 대한민국 노른자 땅에 다른 업종도 아닌 서점(교보문고)을 운영하고, 공익재단만도 3개나 되는 교보생명의 저력은 이런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았나 싶다.

 스스로 경계하고 다짐하는 뜻을 담은 물건이라면 조선시대 거유(巨儒) 남명(南冥) 조식(1501~1572) 선생의 성성자(惺惺子)가 먼저 떠오른다. 초상화로 묘사된 선생의 왼쪽 허리춤에도 성성자, 즉 두 개의 쇠방울이 보인다. 딸랑딸랑 소리가 날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는 취지다. 남명은 사욕이 일어나면 단칼에 베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장도도 늘 차고 다니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쉽게도 두 유품은 사라지고 없다. 경남 산청 남명기념관에는 후대에 복원한 성성자·경의검이 전시돼 있다.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 조종명(72)씨는 “성성자는 남명이 외손서(外孫壻·딸의 사위)인 동강(東岡) 김우옹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 행방이 묘연하고, 경의검은 근 50년 전에 도난당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최인호의 『상도』에는 자계(自戒)의 또 다른 상징이 등장한다. 잔이 7할 이상 차면 저절로 술이 새버리는 계영배(戒盈杯)다. 조선 거부 임상옥(1779~1855)이 애지중지한 물건으로 소설에 소개돼 널리 알려졌지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과거 주변 인사들에게 즐겨 선물하면서 유명세가 곱절로 돋쳤다.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당직자·출입기자,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국대사 등이 박 당선인에게서 계영배를 받았다고 한다. 절제의 미학이 담긴 선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제대로 짚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개인사도 그럴진대 막중한 국사(國事)는 말할 것도 없다. 어디까지가 7할이고 어디서부터 위험해지는 8할대인가. 기초노령연금, 중증질환 진료비 보장 등 당선인의 복지공약을 놓고 벌써 전문가와 각계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아마 당선인도 계영배에 수없이 물을 따르며 차고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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