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발을 뺄수도 없는 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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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는 기자 윤리강령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식 투자를 못하게 돼 있습니다. 비밀스런 정보를 남보다 앞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이라, 스스로 정한 도덕률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회사에 돈을 대고 있습니다. 저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대니까요. 매달 조금씩, 그러나 저한테는 아깝고도 많은 돈이 이 회사에 들어갑니다.

*** 눈덩이 부실채권에 골병

최근에 걱정스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회사가 어렵다는 겁니다. 사정을 좀 알아봤습니다. 소문대로였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4년 전 나라 사정이 갑자기 나빠졌습니다. 그 회사도 어려웠죠. 조금이나마 흑자를 내기도 했던 회사였습니다만 나라 사정이 그러하니 적자를 본 건 당연했습니다. 문제는 여러 계열사에서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회사는 일년 수입이 1백억원 정도 되지만 그걸 다 쓰고도 모자라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자회사가 부실채권을 매입하고 부실금융기관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부실채권을 높은 값에 되팔고 부실금융기관의 주가가 오르면 남는 장사라는 겁니다. 그 후 그 자회사가 발행한 채권에 대해 빚보증 선 것이 99억원입니다.

문제는 내년부터 이 자회사가 발행한 채권에 대한 이자와 원금(합 9.7억원)이 돌아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 자회사가 돈을 댄 곳에서 자금회수(지금까지 25%)가 잘 안되거든요.

그래서 내년에 본사에 내야하는 이자는 뒤로 미루고 원금 돌아오는 건 새 채권(4.5억원)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답니다. 자회사들이 몰리다 안되면 본사가 떠안겠다고도 합니다.

본사라고 사정이 좋은 건 아닙니다. 빚보증 선 것 말고도 계속되는 적자 때문에 자체의 부채가 이미 지난해 말에 1백20억원이 넘었습니다. 내년에 갚아야 할 원리금이 17억원이나 되는데 자회사 빚까지 떠안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사 빚 갚는 것도 새 빚(채권 차환발행)을 얻어서 막으려고 할 것으로 시장은 보고 있습니다.

이 회사의 경영도 이상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경영이 아주 어려웠을 때 구조조정 한다며 사원을 13% 줄이겠다고 하더니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해서인지 실제로는 4%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임금도 잘나가는 다른 회사 수준에 맞춘다며 적자 속에서도 3년 연속 10% 이상씩 올리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맡겨 놓은 제 노후자금을 회사 수입처럼 회사 살림에 보태쓰고 있고, 또 이 회사를 통해 관리하는 건강기금도 펑크가 나 내년에만 3억원 넘는 회사 돈을 거기에 쓴다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회사에 계속 돈을 대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이민을 가기 전에는 여기서 발을 뺄 수도 없고, 내후년 봄까지 대표이사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이 회사가 바로 우리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밝힌 금액의 억 단위를 조 단위로 바꿔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사정을 아시리라 봅니다. 그러나 교실이다 복지다 하며 예산을 쓰시는 걸 보면, 얼마나 문제가 심각한지는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관료들이 내후년에 적자가 해소된다는 얘기를 했고, 또 잘 모르는 사람이 재정위기 얘기를 꺼내면 그건 기우(杞憂)일 뿐이라고 대통령께 말씀드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 재정위기 정말 기우일까

그 분들이 대통령께 "지금 고통이 따르고 인기가 떨어져도 다음 대통령, 다음 세대의 짐을 덜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는 길입니다"라는 말씀을 차마 드리지 못하는거죠.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바른 말도 임금이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해야지 직언 한답시고 공연히 모나게 입을 놀렸다가 나라 일을 그르치면, 그 신하는 충신이 아니라 역적이라는 얘기였던 것 같습니다.

간신처럼 보일지 몰라도, 대통령 마음을 상하지 않으면서도 나라사정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수 있는 '교언영색(巧言令色)'할 수 있는 관료가 아쉽습니다. 저 지금 기우하고 있습니까.

김정수 <논설위원 겸 경제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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