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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17)-유홍열|북학파의 영수 연암 박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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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쟁쟁한 양반 후손
박지원은 영조의 사위이던 금성위 박명원의 8촌 아우라는 쟁쟁한 양반집의 자제로서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탓으로 늦게야 글을 배우되 벼슬을 얻으려는 데는 뜻을 두지 않고 이용후생의 실학을 닦다가 그 8촌형을 따라 북경 및 열하지방에 다녀온 때부터는 열하일기라는 책들을 지어냄으로써 북으로 청국의 근대적 문물제도를 배워들일 것을 주장한 북학파의 영수였다. 그는 반남에 본관을 둔 노론벽파의 돈영부지사(정이품) 박필균의 손자이며 박사유의 둘째 아들로서 영조 13년(1737)에 서울에서 태어나 자를 중미 호를 연암이라 일컬었는데 그의 8촌형이던 박명원은 영조의 세째딸인 화평옹주를 아내로 맞이하였었다.
◇16세에 아내 맞아
이와 같이 이름난 집안에 태어난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몸집이 크고 뚱뚱하며 마음씨가 높고 넓었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탓으로 그 할아버지는 그를 가엽게 여겨 글을 닦지 말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할아버지를 또한 여의고 16세 때에는 전주 이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의 처삼촌이던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그가 글을 닦지 않았음을 알고 타일러 말하기를 『선비로서 배우지 않는 사람이 있을 소냐』라 하고 그 자리에서 신릉군전을 끄집어내어 구독을 가르쳤다. 연암은 이 책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서 곧 이에 대한 논설 수백언을 지어 올리니 이 교리는 이를 보고 크게 놀랐다 한다.
이로부터 연암은 오로지 글을 닦는데 힘써 3년 동안 집에 숨어서 백가의 책을 두루 읽고 경제·병농·전곡 등 경세요무를 밝히며 천문·지리를 탐구하였다.
◇홍대용과 친한 벗
그의 집은 서울 중부 탑동(낙원동)에 있었는데 이곳에는 1765년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과 1778년 북경에 다녀온 이덕무(덕무), 박제가와 유득공·이서구들이 모여 글을 닦고 있었다. 그는 이들로부터 북경의 이야기를 듣고 살기 좋은 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길을 생각하며 특히 홍대용과 더불어 천주·지리학을 연구한 끝에 『땅덩어리가 하루에 한번씩 돌고 있다』는 자전설을 세우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고 그 벗들과 때로 술을 즐기면서 속임수로 살아가는 부패한 귀인과 뭇 선비들을 욕하여 숨김이 없었다.
◇반대당으로 몰려
이러한 때에 정조가 즉위하여(1776) 그의 신변을 지켜주던 홍국영을 도승지 겸 금위대장으로 삼아 모든 정사를 그의 손을 거쳐 처리하게 함으로써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하니 홍국영은 연암을 아끼고 사랑하던 이조판서 홍낙성들을 반대당으로 몰아 죽이려 하였다. 이 흉계를 듣고 41세의 연암은 서울을 탈출하여 개성을 거쳐 황해도 금천연암협에 있던 옛집으로 숨어 가난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냈는데 그의 호는 이곳의 이름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이때 그의 친우로서 정조의 사랑을 받고 있던 경연관 유언호는 자원하여 개성유수로 되어 3년 동안 그의 살림살이를 돌봐주었다. 연암은 이곳에서 뽕나무 밤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를 심고 소 물고기 벌을 길러 산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44세에 청국구경
이러는 사이에 세도가 홍국영이 1780년에 내쫓기어 죽고 연암의 8촌형이던 금성위 박명원이 진하사로 북경에 가게되니 연암은 44세의 나이로 그를 따라가 바라고 바라던 청국 문물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는 봉황성 책문을 넘어서면서부터 중국의 훌륭한 가옥 차마 교역제도 등을 보고 놀랐으며 북경까지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19경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특히 그는 북경에 머물러있던 짧은 시일의 틈을 내서 남천주당을 찾아가 둥근 지붕의 높은 서양식 성당을 보고 놀랐으나 성직자들은 만나보지 못하여 성당내부를 구경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청국황제 고종은 더위를 피하여 열하로 가 있었으므로 그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졌던 진하사 일행은 곧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서 연암은 중국학자 왕민호(호) 홍려사 소경 조광운을 만나 학술을 논하는 가운데 중국인의 청조에 대한 감정을 살폈다.
◇50세에 선공감에
이리하여 열하로부터 귀국한 연암은 그가 중국에서 보고들은 일과 이야기한 일들을 적어 열하일기라는 26권의 책을 내놓음으로써 온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그는 1786년 50세 때에 비로소 왕실의 토목공사를 맡아보는 선공감감역(정구품)의 벼슬을 받고 이어 사복사주부(종육품), 의금부도사(종오품), 제릉령, 한성부판관(종오품)을 거쳐 1791년에는 경상도 안의현감이 되었다. 이 현감을 사는 6년 동안에 청렴하고 자애의 정치를 베풀어 여러번 사형수를 살려주었다. 바로 이때 정조가 그의 열하일기를 읽고 그 문체가 기이한 소설체임을 꾸짖으니 순정한 글을 올려 사죄하였다. 이어 그는 1796년 60세 때에는 안의현감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왔다가 다음해에는 충청도 면천군수가 되었다.
이때(1799) 정조가 전국에 명령을 내려 농업개량법에 관한 책을 구하니 연암은 그가 일찌기 지은 과농소초 15권에다가 안설, 안민명전의를 붙여 이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64세에 양양부사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연암은 1800년 64세 때에는 강원도 양양부사가 되었으나 다음해에는 노병을 핑계로 이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4년 후인 1805년 10월 20일에 69세로 죽었다. 그의 저서로는 열하일기·과농소초 외에 부패한 양반계급을 날카롭게 비웃고 욕한 마장전, 예덕 선생전, 광문자전, 민옹전, 양반전, 김신선전, 우상전, 호질, 허생전이라는 한문소설이 있다. 그는 훈민정음을 잘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국문소설을 지을 수 없었고 따로 살던 아내 이씨에게 한번도 편지를 보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한글몰라 고민도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북으로 청국의 문물제도를 배울 것을 주장한 북학파의 영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의복이 명조의 그 것에 닮았다하여 자랑하나 그것은 상복에 지나지 않으며, 오랑캐 모양으로 머리를 깎지 않음을 자랑하나 상투는 남만의 풍속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웃으면서 비록 오랑캐나라의 것이라도 좋은 것은 배워들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그는 양반계급의 사람이면서도 썩어빠진 양반계급의 모습을 이모저모로 날카롭게 비웃는 많은 소설을 지어 허식을 버리고 실리를 찾아야 한다는 근대적 개혁사상을 불러 일으켰다. <문박·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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