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살생부' 나도는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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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당의 존립 목적은 정권 창출에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집권당이 정권 창출의 기여도에 따라 그 구성원을 중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 치더라도 정권 재창출 과정의 활동을 기준으로 '죽이고 살릴' 명단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우려할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일이 누구에 의해 이뤄졌는지 불분명하지만 최근 민주당 내에 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을 '역적'과 '공신'으로 분류한 이른바 살생부(殺生簿)가 나돈다는 소식은 듣기에도 너무 섬뜩하다.

그 명부가 특히 盧당선자나 노사모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돼 있다는 데서 더욱 걱정이 된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물론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본격적인 정치 보복의 서막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물론 당선자 측은 이를 만든 적이 없다고 한사코 부인하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정권 교체기나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이런 유의 괴문서가 나돌았던 적이 있고,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인적 청산론'이 당내에서 제기된 사실 등을 미루어 보면 청산 대상으로 거론된 의원들이 불안감과 충격,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선자 측이 인적 청산을 위해 애드벌룬을 띄운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수도 있다.

따라서 당선자 측은 이를 부인만 할 것이 아니라 작성자를 밝혀내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민주 사회에서 이런 식의 살생부로 정치를 살벌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익명성과 동시 다발의 위력적인 전파력을 특성으로 한 인터넷을 이용한 방식으로 인민재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국민 참여 확대, 쌍방향 의사 소통 등 인터넷의 정치 발전에 대한 순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도 그렇다.

이를 유야무야하면 포퓰리즘을 성행시킬 우려가 있음을 당선자 측은 인식해야 한다. 그 부담은 결국 집권자 측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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