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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소명〉이조중섬∼말집 인물중심-유홍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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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병연은 이조 23대 왕 순조의 장인이던 김조순의 먼 손자벌 되는 당당한 양반집안의 자제로서 반난을 일으킨 홍경래에게 한 때 항복한 죄로 사형을 받은 그의 친할아버지이던 선천부사 김철순을 호되게 욕하는 시를 그 할아버지인 줄 모르고 과거시장에서 지었다가 내쫓기어 거지 행세를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사이에 시로 써 기구한 그 스스로의 위명을 달래고 온갖 권세를 누리던 양반계급을 비웃으며 욕하고 가난에 조들리던 불쌍한 백성을 동정한 방랑시인이었다.
그는 안동에 본관을 둔 김재순의 손이며 김안근의 아들로서 순조7년 (1807) 에 낳아 자를 성심, 호를 난부 (난곤라 일컬었으나 방랑시절에 늘 삿갓을 쓰고 다녔다하여 흔히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에 앞서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로 자리에 오른 후 그 2년에는 노논시파에 속한 김조순의 딸을 옥비(순원왕후)로 맞이하여이 후 정치의 실권을 그 장인에게 넘켜 주었다. 이러하여 김조순은 임금에게 오르내리는 모든 문예와 관리임용과 군단의 기무를 맡아 봄으로써 이른바 세도정치라는 고약한 외척정치를 시작하게되었다.
조부는선천부사
이에 따라 김조순의 일족인 안동김씨가 내외의 요직을 차지하게되어 김달순은 우의정, 김문순은 이조 뒤에, 김희순은 형조, 김이익은 병조판서, 3촌이던 김리도는 예조판서, 4촌이던 김명순은 함경도 감사 등의 자리를 얻고 함부로 그일족만을 뽑아쓰며 백성을 착취하고 이후 50년 동안에 걸쳐 세도를 잡게되었다. 바로 이 때 김삿갓의 할아버지이던 김철순도 무관직을 얻어 함흥중군이 되었다가 1811년 가을에는 평안도 선천부사로 옮아 앉게 되었다.
홍경내의 반난
이러한 때에 과거시험을 보다가 실패한 평안도 용강사람인 홍경내는『나라에서 4백년이래 평안도 황해도 사람을 버려두는 원한을 풀어보자』라는 뜻의 격문을 그 지방에 돌리는 한편 1811년 12월에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일컫고 김사용·우군칙금 창시들과 더불어 박문군다복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군수 정시를 죽인 후 관의 무기를 뺏어들고 이웃 고을로 쳐 들어갔다. 이리하여 그는 벌 떼같이 모여든 농민 2천여명을 거느리고 겨우1주일사이에 선천 등 청천강이북의 8읍을 차지하고 다음해 1월에는 정주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선천부사이던 김재순은 어느날 밤 술에 잔뜩 취하여 군영에서 코를 골다가 갑자기 몰려든 반란군에게 잡히어 할수 없이 항복한 후 반란군을 공손히 맞이하여 그 벼슬까지 받았다.
화명난부친 사망
그리하여 김철순은 부충부의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도망하였다가 이어 관군이 선천을 도로 차지하게 됨에 따라 1812년 3월에 관군에게 잡히어 사형을 받게되고 그 집안은 김씨문중에서 내쫓기게 되었는데 그 때 서울에서 살던 김삿갓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이에 따라 김삿갓의 아버지이던 김안근도 울화병으로 얼마 후에 죽게되니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하인 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옮아가 숨어 살수 밖에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중군 유효원이 거느린 관군은 반란군이 집결한 정주성에 지하도를 파서 이를 파시킨 후 홍경내를 죽임으로써 5개월만에 이 반란을 가라앉혔다.
20세에 장원 급제
일이 이렇게 되니 김삿갓의 어머니는 그 시아버지가 겪은 일을 전혀 모르는 체하고 오직 그 어린 외아들에게 한가닥의 희망을 걸고 정성껏 그를 키움에 힘 썼다. 한편 김삿갓은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을 잘 배우고 시를 잘 지었다. 그리하여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20세가되던 해에 과거시험(소과)에 응하여 『가산군수 정명의 충절사를 논하고 김철순의 죄가 하늘에 포함을 탄합』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보기 좋게 장원급제까지 하게 되었다. 이 때 김삿갓은 김장순이 그의 할아버지인줄도 모르고 날카로운 작문으로 그 할아버지를 호되게 욕하는 전물을 지었던 것이니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으랴. 이 소식읕 전해들은 그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어머니로 부터 그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된 김삿갓도 또한 가슴이 메어져 신세를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김삿갓은 가혹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덧없이 방랑의 길을 띠났다. 삶의 빛을 잃은 그에게는 오직 아름다운 산수와 시의 세계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죽장에 삿갓쓰고 3천리를 방랑하면서 시를 읊는』 그의 걸식행각이 시작되었는데 그가 구태여 그러한 몸차림을 하게된 것은 할아버지를 욕한 불효손 으로서 어찌 하늘을 볼 수 있겠느냐라는 효심에서였다. 그는 먼저 금강산의 웅장한 절경과 구용산의 선경을 찾으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쉽지않은「오한」
나는 육신을 향하여 가는데 (아향육산거) 녹수야 너는 어디서 오느냐 (연수이하내)그러나 그의 걸식행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도정치가의 가혹한 착취와 거듭한 흉년과 미약한 열사병등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인심은 메마를 대로 메밀라 있었다. 그러므로 이 거지꼴의 길손을 맞아주는 대접이란 말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세상일을 비웃으며 스스로를 달래는 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 하나를 들면 다음과 같다.
네 다리 손반에 죽 한 그릇 놓였는뎨 (사각송반죽기)
하늘 빛 구름 그림자 어른거리네 (천광운영공배회)
주인이여 미안하게 여기지 마오 (주인막도무안색)
나는 음산이 거꾸로 음을 사랑하오 (오애육산도수내)
이렇 듯이 김삿갓은 온갖 푸대접을 받으면서 수십년 동안에 걸쳐 8도강산의 방방곡곡을 두루 찾아다니고 때로는 양반을 비웃고 욕하는 시를 짓고 때로는 예당의 철 없는 훈장을 골곯려주는 시를 읊었다. 그의 시는 거의 한시로 돠어 구전되고 있으나 그 밖에 다음과 같이 한글을 섞어지은 시도 있다.
음산 듬성듬성 입인간 여기저기 유소위 어뜩삐뜩 객 평생 쏘다니다 주국턱의 선구자
그는 『언문 (한글) 과 진서 (한문)를 섞어지었다고 시비하는 자는 모두 내 아들이다』 라는 시도 남겼으니 그는 틀림없이 근대적 국문시의 선구였다. 그토록 익살스럽고도 비웃는 시를 많이 읖으면서 외롭고도 고된 삶의 길을 헤매던 김삿갓 병연은 안동김씨의 두 번째 세도가 종극을 고하던 철종11년 (1863) 에 방랑객지에서 57세로 한 많은 숨을 거두었다.<문신 서울대문리대교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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