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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노 「챌리·채플린」| 77살에도 「메거폰」잡는 정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나는 죽을 때까지 영화를 만들 것이다. 나는 마지막 작품을 내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 것이다』 1963년 세기의 희극왕 「챌리· 스펜서·채플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다.
작은 키에 긴「스티크」, 지나치게 작은 모자에 엄청나게 큰 구두, 보기 흉하게 작은 양복 저고리에 나팔 통같이 넓고 긴 바지,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질 부조화하고 불균형한 모습으로 등장한 영화로 한 세기동안 세계를 웃기고 울리던「챌리·채플린」도 이제 77세. 이제 조용히 자손들과 과거나 회상하며 지낼 나이지만 영화예술을 향한 그의 꺼질 줄 모르는 정열은 이 고령에도 그를 영화제작의 격무로 몰고있다.
그의 마지막영화 「뉴요크의 왕」이· 공연 된지 6년만에 그는 최근 영국「버킹엄셔」에서 영화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촬영의 감독에 4개월간의 정력을 쏟아 경탄 할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의 최초의 천연색영화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은 지난달 촬영을 끝냈다. 그는 지금 자르지 않고 그냥 상영하면 l2시간의 상영물이 될 「필름」을 연일검토, 「커팅」 편집하기에 그의 마지막 생명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의 이번 영화제작에 정통한 사람들 중에는 이 작품이 불후의 희극 걸작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시대착오적인 대 실패작이 될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필름」의 편집이 끝날 때까지는 대감독 「채플린」자신 밖에는 아무도 예단하지 못할 것이나 지금으로서는 「채플린] 자신도 단언은 못 하고 있다. 그는『한치라도 불필요한 것은 잘라야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화는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소피아· 로렌」과 「말론·브란도」가 출연하는 이 작품은 대사·음악· 배경· 의상· 촬영에 이르는 제작의 모든 과점에 그의 손과 숨결이 닿았다. 「로렌」의 입술과 팔꿈치의 각도,「브란도」의 걸음걸이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까다롭게 수정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 이 작품의 구상은 극히 가벼운 것이나 이 작품에 걸린 책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이 책임을 「채플린」 혼자서 지고있는 것이다.
촬영이 잘된날은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인 그도 잘못된 날은 무거운 우울에 눌려지냈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감독태도에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하고 불평하는 배우·제작자도 많았다.
빈곤의 시궁창에서 입신, 인류의 애환을 웃음으로 풍자하여 일세를 풍미하다 한때는 공산주의자라는 무실의 혐의로 그는 40년을 살던 미국에의 귀국도상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그 동안 평화가 헌법으로 보장된 「스위스」에 37「에이커」의 녹지대를 마련, 자손들과 조용한 나날을 즐겼다. 그는 고통스럽고 다채로운 말소불능의 문신 같은 빈곤에서 자랐다.
꽃장수·장난감 직공·인쇄공·유리닦이 등의 밑바닥의 경험에서 희극의 무한한 소재를 얻어 만든 그의 무수한 희극들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장면은 석양의 길가게 지친 방랑자, 영화 「현대」에서의 인간에 도전하는 기계, 맛보지 못한 「럼」주에 대한 호기심을 누를 길 없어 사형직전 집행인에게서 청해 받은 「베르더」의 술잔, 이런 장면이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장면이 될지 모를 「백작부인」에서는 무슨 장면의 선물로 인류의 뇌리에 문제를 던져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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