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힘든 시대 관객은 웃음 원한다

중앙일보

입력

이번 주부터 주필호씨의 영화 마케팅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주씨는 10여년간 충무로에서 영화방이라는 홍보 및 마케팅 회사를 운영해왔습니다.

영화 마케팅은 광고 카피와 디자인을 비롯해 각종 이벤트와 언론 홍보 등을 통해 완성된 영화를 포장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얽힌 비화가 펼쳐집니다.

요즘 한국영화계를 설명하는 트렌드로 '조폭'과 '엽기'를 든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 영화 제작자나 마케팅을 담당한 입장에서는 이런 사후적인 분석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얼마 전 '엽기적인 그녀'가 히트하자 엽기 코드 때문에 흥행에 성공했다고들 했다. 그렇다면, 김기덕 감독의 '섬'이나 박대영 감독의 '하면 된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인간의 뇌를 파먹는 '한니발'은 엽기 코드가 아니어서 흥행작이 못 된 것일까□

작년에 필자가 마케팅을 대행한 영화 중에 '무서운 영화'라는 외화가 있었다. 기존에 나온 각종 공포 영화들을 무차별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제작에 관여한 이들의 지명도나 작품의 수준만 놓고 보면 관객에게 먹힐 요소가 별로 없었다.

'총알 탄 사나이'같은 기존의 패러디 영화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공포영화의 패러디로 몰고 가기엔 부담이 있었다.

공포영화라는 장르가 다소 칙칙해 웬만해서는 대중성이 떨어지는 데다 패러디로 인용되는 공포영화들을 관객이 모르고 있을 땐 패러디의 효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마케팅 포인트로 삼은 것이 '매트릭스'를 패러디한 공중 발차기 장면이었다.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를 본 관객 중 이 장면을 기억하지 못할 이들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을 내세우면 눈길을 끌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입선전이 안 좋을 것을 우려해 시사회는 전혀 하지 않았다. 보통 영화들은 개봉 전에 5회에서 10회 정도의 시사회를 갖지만 이를 피했다. 작품에 자신이 없을 땐 시사회를 하지 않는 게 득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포스터를 비롯해 방송 광고 등에서 오로지 문제의(?) 공중 발차기 장면만을 부각시켰다.

또한 광고 카피는 '공포를 폭소로 바꾼 엽기'로 했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공포영화의 느낌을 폭소라는 코믹 요소로 덧씌우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관객들은 유치하지만 웃기고 재미있고 또 엽기적이라고 말했다. 관객들이 '엽기적'이라고 한 것은 그 유치한 패러디 장면들이었다. 관객들에게 그것은 기괴함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의 엽기가 아니라 어이없음에서 오는 웃음(혹은 냉소) 및 폭소와 연관되는 엽기였다.

온 나라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사람들의 웃음을 빼앗아 가버렸다. 스트레스가 강한 사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은 참을성이 없어지고, 진지한 것 대신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올 들어 흥행한 '친구''신라의 달밤''엽기적인 그녀''조폭마누라'의 진정한 공통분모는 바로 코미디다.

이들은 '엽기''조폭'이라는 트렌드를 간파해서 성공했다기보다는 웃음이 없는 불안의 시대에 코미디를 원하는 관객의 감성에 가 닿았기 때문에 잭폿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시대가 관객을 부르고 관객이 트렌드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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