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피치] '우리'를 깨달은 김병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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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잠들지마 BK!"

김병현(22.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버릇은 '잠'이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잠꾸러기'로 통한다. 동료 투수 브라이언 앤더슨은 "그가 라커룸에서 보이지 않을 때, 잘 찾아보면 한 구석에서 영락없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 7차전 끝내기 안타를 때린 루이스 곤살레스는 "세상에 하루에 18시간을 자는 인간은 처음 봤다. 갓난아기처럼 잠을 많이 잔다. 버스에 타고 바퀴가 굴러가는 순간 그는 꿈속을 헤맨다"며 놀라움을 표시한 적이 있다.

BK는 왜 잠을 많이 잘까. 그의 잠은 외로움과 낯선 환경에 대한 그의 방어책이었다. 그는 3년 전 미국에 진출한 뒤 낯선 환경과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평소 혼자있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한몫 했지만 동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고, 미국 문화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라.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라커룸. 친한 동료를 만들지 못해 외롭게 앉아있는 BK. 팀 동료들에게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온' 갓 스물이 지난 애숭이로 비치는 BK. 동료들과 다른 외모에 왜소한 체격, 자기 할 일을 알아서 해야 하는 BK를.

그래서 그는 잠을 택했다. 말없이 혼자 앉아있느니 그냥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잠을 깰 때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보여준 다이아몬드백스 선수들의 동료애는 BK를 더 이상 낯설고 외로운 존재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가 4,5차전에서 팀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동점·역전 홈런을 얻어맞았을 때 그의 동료 가운데 단 한명도 BK를 비난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따뜻하게 BK를 감쌌다. 밥 브렌리 감독도 마찬가지였고 다이아몬드백스의 팬들도 한뜻이었다.

"그는 우리팀의 마무리다. 다시 그런 상황이 또 돌아온다면 그 몫은 BK의 것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며 용기를 북돋워준 브렌리 감독, 그리고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고 양키스타디움 마운드에 주저앉아 있는 그를 일으켜 세워준 마크 그레이스와 포수 로드 바라하스, 마지막 7차전에서 '오늘 승리는 김병현을 위한 것(This win is for Kim)'이라는 격문을 들고 나온 팬이나 '우리는 괜찮아, BK(We'll Be oK,Kim)'라며 그에게 성원을 보낸 팬들은 어린 김병현에게 너무나 큰 힘을 주었다.

김병현은 7차전을 앞두고 "이제까지 야구를 혼자 해왔다. 내가 투수였기 때문에 더 심했다. 나만 잘하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 시리즈를 통해 나와 동료들이 가족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겨도 '우리'가 이기는 것이고, 져도 '우리'가 지는 것이다"며 단체운동의 미학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더 이상 라커룸에서 잠들지 않을 BK를 그려본다. 동료들과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씩씩한 동작으로 마운드에 올라가 힘차게 승리를 지켜줄 BK를. 그는 분명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우승반지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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