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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와 가시 사이 … 은행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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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새 정부 중소기업 정책 맞춰
수조원대 대출 확대 잇따라
계약직 정규직 전환 경쟁도

새 정부 코드 맞추기일까. 보수적이기로 이름 높은 은행권이 잇따라 새 정부 기조에 적극 부합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큰 중소기업 대출을 화끈하게 늘리는가 하면, 노동계의 오랜 요청에도 불구하고 묵살해 왔던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KB국민은행은 곧 중소기업 무담보 대출 프로그램을 재개한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응급 수단으로 동원했던 것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다. 국민은행이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에 종잣돈(seed money)을 출연하면 이를 기반으로 신보와 기보가 10여 배를 보증하고, 이 금액만큼 국민은행이 중소기업에 대출을 해주는 방식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보증기관들과 출연금 규모를 마지막으로 조율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아예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지원 용도로 8조2000억원을 신규로 배정했다. 이 중엔 새 정부에서 본격 추진할 중소기업 적합 업종 해당 업체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여신 2조원, 자영업자의 임대보증금을 담보로 한 대출 1조원 등이 포함돼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기존 중기 대출 체계로는 미흡하다고 판단해 작심하고 종합적 지원책을 마련했다”면서 “일부는 새 정부 스케줄에 맞춰 지원하려는 것으로, 재원을 다른 용도에 쓰지 못하도록 미리 잡아놓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하나은행은 올해 중소기업 대출을 지난해보다 3조원 늘릴 계획을 잡았다. 외환은행은 금리를 0.2~0.5%포인트 깎아주고 신용도가 다소 낮더라도 빌려주는 기업스마트론 3조원 가운데 2조2000억원을 중소기업에 배정했다.

 고용 분야에선 연일 파격적 뉴스가 나오고 있다. 계약직 텔러 838명을 전원 정규직으로 발령 내거나(신한은행), 기간제 계약직 1132명 모두를 사실상 정규직인 무기계약직으로 전환(IBK기업은행)한 것이다.

 은행들은 민생 안정과 중소기업 살리기에 역점을 두는 새 정부 코드를 감안한 조치임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익명을 원한 한 시중은행 행장은 “인수위 쪽에서 따로 연락은 없었지만, 박근혜 당선인이 중소기업 성장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은행이 알아서 먼저 중기 대출을 확대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금융 당국도 새 정부 코드에 맞춰 은행권을 압박하고 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조만간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현황을 종합 점검하려 한다”면서 “지난해 시중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애초 계획보다 줄이지 않았는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대출 비율은 어떤지 등을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렬·이태경 기자

중기는 방카슈랑스 꺾기 악몽
5억 대출에 월 500만원 납입
수년간 돈 묶여 더 큰 피해

경기도 수원에서 중소형 제조사를 운영하는 A씨는 최근까지 방카슈랑스(저축성 보험) 때문에 적잖이 속앓이를 해야 했다. 2011년 9월 시중은행을 통해 5억원 대출받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소유한 회사법인 명의로 10년 만기 방카슈랑스를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야 했던 것. 가입한 상품의 월 보험료는 500만원 정도였지만 어려운 사정 탓에 1년 만에 해약할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자금 사정이 나빠져 해약하는 바람에 납입 원금 6000만원이 3분의 1 토막이 났다. 주변엔 나처럼 방카슈랑스 꺾기 때문에 피해를 본 사례가 숱하게 많다”고 하소연했다.

 중소기업인들의 구체적인 애로점을 해소해 주겠다며 박근혜 당선인이 밝힌 ‘손톱 밑 가시’ 발언 이후,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발목을 잡는 대표적 사례로 금융권의 ‘방카슈랑스 꺾기(방카 꺾기)’가 거론되고 있다.

 방카슈랑스는 적어도 5∼10년 정도는 유지해야 원금 보전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엔 대출을 받기 위해 반강제로 예·적금 상품에 가입했던 이전의 꺾기보다 한층 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서울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B씨는 “차라리 3년 만기 적금이 낫지 은행에서 방카슈랑스를 권하면 막막하기만 하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또 “5억원을 대출받으면 500만원짜리 5년 납부 ‘방카’를 가입하는 건 기본”이라며 “방카슈랑스 때문에 3개 은행에 들어가는 돈만 월 2000만원은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규제를 피하려는 은행의 방카 꺾기 수법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대출 이후 한 달 이상 가입 시차를 두거나, 대출은 법인에 내어주되 금융상품은 대표 등 개인을 가입시키는 방식이 가장 흔하다.

 대기업 건설사에 자재를 납품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당장 자금 사정이 어려운데도 10년 후를 내다보고 월 수백만원 하는 저축성 보험에 가입할 ‘배짱 좋은’ 중소기업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유현 정책총괄본부장은 “요즘엔 지점 직원이 꺾기를 강요하면서 본점에서 연락이 오면 ‘자발적으로 가입했다고 답하라’는 식으로 대응책까지 알려준다”고 말하며 “새 정부가 진심으로 손톱 밑 가시를 뽑겠다면 출총제 부활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꺾기 관행부터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꺾기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예·적금 등 금융상품 가입을 강요하는 것. 돈을 빌린 사람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이뤄진다. 대출금 중 일부를 떼어 가입시키기 때문에 표면상 나타나는 금리 이상으로 실질금리를 인상한 효과를 갖는다. 주로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인·소상공인과 서민들이 꺾기를 강요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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