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1972년 외교문서 공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외교통상부는 12일 1972년도 외교문서 7백98권(8만2천여쪽)을 일반에 공개했다. 공개 문서 중에는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북.미 움직임과 10월 유신에 대한 미.일 반응 및 우리의 대응이 나와 있어 현대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7.4 남북 공동성명

○…박정희 정부는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미국이 대북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주한미군 감축을 고려하자 한.미 관계 유지를 위해 다각적인 외교 노력을 강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 공동성명 발표 이후 대미 외교의 문제점과 대책' 보고서는 "미국은 한국에 대해 계속적 군사원조 제공 등을 다짐한 바 있으나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북한을 포함한 모든 나라와의 관계개선을 원하고 있다'고 한 데 이어 북한을 'DPRK'(영문 국호)로 표현하는 등 북한에 대한 정치적 접근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어 "미국은 북한.월맹(베트남).쿠바에 대한 미국 시민 여행 제한을 73년 3월 해제할 가능성이 있으며,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도모함으로써 '닉슨 독트린'(미국의 안보역할 축소론)의 실천을 용이케 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기정 정책 방향으로 설정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또 "여타국들도 미국이 '두개의 한국' 정책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해 두개의 한국 정책을 추구할 우려가 있어 남북대화 추진에서 한국의 입장을 곤경에 빠뜨릴 우려가 있다"면서 "특히 공동성명의 '외세 간섭없는 자주 통일노력…' 구절은 미 의회 내 비둘기파 인사들에게 주한미군 추가 철수 및 대한 군사원조 삭감 주장의 구실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에 따라 ▶고위 사절단의 미국 파견▶한.미 양국의 정계.학계.언론계.경제계의 활발한 교류▶대언론계 접촉 강화▶미국 의회 내 진보파 의원들에 대한 활발한 접근 등의 외교적 조치를 통해 "힘에 입각한 대북한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7.4 남북 공동성명 채택을 자신들의 통일 원칙을 한국이 수락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남북 문제에 대한 유엔 간섭 배제를 추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72년 8월 인도네시아 국경일 리셉션에서 주(駐)양곤 한국 총영사의 박인근 북한 총영사와의 대화 내용' 기록에 따르면 당시 朴총영사는 "우리의 통일원칙을 남조선에서 수락해 기쁘다"고 말했다.

朴총영사는 "공동성명에서 '외세개입 반대'에 합의한 이상 미군 철수와 유엔재건위원회(UNCURK) 해체는 당연히 이뤄져야 하고, 과거의 잘못된 모든 유엔 결의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총영사가 "한국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누구보다 기원해 왔으며 북한의 재침략 준비가 기회를 가로막아 왔다"고 반박하자 朴총영사는 "7.4 성명 전에도 당신네(한국)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었는데 다만 당신네 측에서 접촉을 꺼렸을 뿐"이라고 맞받아쳤다.

◇10월 유신

○…박정희 정부는 72년 10월 유신 선포 직후 미국 내에서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로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10.17 특별성명(10월 유신)과 관련한 대미 특별 활동계획'은 "미 정부는 의회 심의 과정에서 (대한)군사원조의 삭감을 예상하고 있으며, (유신 선포에 따라) 주한미군의 조기 철수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 정부.의회.언론 등을 상대로 한 구체적 활동 계획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주미 대사에게 ▶미국 정부 요로 접촉을 통한 반응 타진과 설득 ▶미 의회 내의 비판적인 여야 간부 및 외무.세출위 내 중진급 의원 접촉 ▶저명한 칼럼니스트 활용 및 유리한 환경 조성 ▶신문의 독자투고란 이용을 지시했다. 칼럼니스트 활용과 관련해선 '73년 3월까지 평균 월 1회 칼럼을 게재함(특별예산 5천달러×6=3만달러)'으로 기록돼 있다.

○…미국은 10월 유신의 배경 중 "긴장완화 과정에서 강대국이 제3국이나 중소국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구절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해명을 요구했다. 반면 일본은 이해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10.17 특별성명 관련 각국 주요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 레너드 당시 한국과장은 유신 다음날인 72년 10월 18일 이상옥 당시 주미 참사관(전 외무장관)을 불러 "한국이 그동안의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안정, 그리고 외교적 성공 등으로 국제적 신망이 과거 어느 때보다 두터운 때에 왜 그와 같은 조치를 돌발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안됐는지 납득이 안된다"고 말했다.

미국의 로저스 국무장관도 유신 선포 하루 전인 10월 16일 오후 주미대사가 미리 배경설명을 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특별선언 내용 중 강대국에 대해 언급한 일부 구절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당시 총리는 일본에 파견된 정일권 특사와의 면담에서 "(10월 유신이) 조금 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나 (한국 정부가) 남북대화를 계속 진전시키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리=오영환 기자

<사진설명 전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