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새 출발 대통령'을 위한 제언(노성태 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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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대통령'. 대선 기간 중에 자주 듣던 말이었는데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횟수가 여전하며, 이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도처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현재 분위기나 이 말이 암시하는 바는 지금까지의 역대 대통령 모두를 실패작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 치부 부각되고 업적은 묻혀

이러한 판정은 반드시 정확하다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새 출발하는 대통령의 자세나 행동을 오도해 또 다른 실패로 이끌 염려가 있다.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대대로 실패를 거듭했다면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나라는 50년 전 쓰레기통 같은 모습에서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를 꽃피워냄으로써 전후 개발도상국 중 가장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들은 다 엉터리였지만 국민이 잘나서 그렇게 됐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현직 대통령들의 집권방식이나 임기 말에 드러난 치부 때문에 국민이 반감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이 임기 중 나름대로 내린 결단이나 쌓은 업적 중에는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생존한 사람들 중에서 우선 전두환 대통령은 만성적인 인플레를 퇴치하고 안정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공적이 있다. 이에 못지않은 것으로 주위의 권고와 유혹이 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임 통치의 결단을 내린 바 있다.

노태우 정부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크게 확충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급속한 발전에 기여했다. 참모를 시켜서라도 대통령 권력이 어떤 것인지 한두번 본때를 보여주었더라면 물태우라는 소리가 사라졌겠지만 참고 견딘 점은 절대로 낮게 평가할 일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쓰러진 경제를 일으켜 세웠을 뿐 아니라 남북 간의 긴장을 크게 완화한 점이 돋보인다.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지적되곤 하는 김영삼 대통령도 금융실명제 등 개혁조치를 실행에 옮겼으며 군사정부의 잔재를 일소한 공 또한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한때 군부의 기피인물이라는 설까지 돌던 김대중 대통령이 어려움 없이 취임하고 햇볕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영삼 대통령이 군 내부를 개혁해 정치군인들이 발붙일 자리를 없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전임 대통령들의 이러한 업적을 무시하고 실패한 대통령으로만 부각시키게 되면 우선 당장은 개혁의 기치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이 때문에 새 대통령이 오만해지고 그것이 독선, 그리고 아집과 연결된다면 개인이나 국가에 엄청난 재난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두 문민 대통령한테서 배웠다.

10년 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식 때 전직 대통령들을 모셔 놓은 자리에서 "부정한 수단으로 권력이 생길 때 국가의 정통성이 유린된다" "새 한국을 건설하자"며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쳤다.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좋게 본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불길한 조짐으로 여긴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 오만·독선 부른 차별화 전략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에 즈음해 스스로를 준비된 대통령으로 소개했고, 그 참모들은 '나라 망친 YS'와 '나라 살릴 DJ'라는 식으로 전직 대통령을 매도하고 차별화 전략을 시도했다.

이런 식의 오만한 출발은 머지않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친인척과 측근만을 믿는 독선적인 통치행태로 이어졌고 결국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전임자를 밟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출발하면 자신 또한 밟히게 마련이다. 새 대통령이 전임자들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인정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출발한다면 '성공한 대통령'으로 마무리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성태 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