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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이 말한 지하경제 ‘활성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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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1993년 8월 전격 발표된 금융실명제로 당황한 것은 YS의 아들 김현철도 마찬가지였다. 측근 박태중의 비망록에 따르면 김현철도 금융실명제 발표를 전혀 몰랐다. 문제가 생겼다. 사조직 ‘나라사랑실천본부’가 대선 때 쓰고 남은 120억원의 실명 전환이 문제였다. 그는 이성호 대호건설 사장에게 70억원을 회사 이름으로 실명화해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성호는 이 돈을 은행에 맡기지 못하고 집 안 금고에 보관하다 2년 뒤 은행 이자까지 쳐서 돌려준다.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시작된 금융실명제가 올해로 20주년을 맞는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우리 금융거래의 관행은 획기적으로 변했다. 증권회사나 은행 창구에서 신분증을 수시로 요구받는 익숙해진 풍경은 20년 전만 해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비실명 거래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한화나 태광그룹 등의 대기업 수사를 보면 차명계좌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금융실명제로 지하경제가 근절될 것이라는 기대도 과장이었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당선인이 ‘지하경제 활성화’라는 말실수를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여전히 살아 있는 지하경제의 현실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지하경제는 ‘활성화’되고 있는 걸까. 국세청은 고액 현금 거래를 꼽는다. 박태중은 김현철의 심부름으로 2억7000만원의 현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가방이 너무 무거워 비서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런 불편은 2009년 이후 많이 없어졌다. 5만원권 덕택이다. 1만원권으로 1억원을 넣으면 무게가 11㎏이 넘지만 5만원권은 2.2㎏에 불과하다. 고교 교장 집에서 나온 17억원, 여의사 집에서 나온 27억원, 김제 마늘밭에 묻힌 110억원의 현금 다발도 5만원권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이명박 대통령 아들 시형씨가 큰아버지 집에서 6억원을 빌려 “큰 가방에 담아 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도 5만원권이 섞여 있기에 가능하다. 5만원권이 유독 낮은 회수율로 시중에 잘 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석연치 않은 거래가 적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세청이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정보를 직접 보겠다고 나섰다. FIU는 2000만원이 넘는 현금거래 자료를 금융회사들로부터 받아 축적하고 있는데 이 자료에 접근하겠다는 얘기다. 그동안 국세청의 일방적 희망에 불과했던 이 방안은 박근혜 후보의 당선 이후 힘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게 있다. 20년 전 도입한 금융실명제의 정신이다. 금융실명제란 실명거래와 비밀보장이란 두 축으로 이뤄진 것이다. 비밀보장이란 당근을 던지며 차명이나 가명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하라는 것이었다. 세수(稅收)를 늘리겠다며 정부가 개인 금융정보에 광범위하게 접근하는 것은 자칫 실명제의 근간을 해칠 수 있다. 비밀보호라는 장막이 걷히면 오히려 금융거래를 회피하고, 돈은 더 깊게 숨는 역효과가 생길 수 있다. 박 당선인의 진의와는 달리 진짜 지하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