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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실학의 비조-반계 유형원|유홍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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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두살 때 부친 작고>
유형원은 이조 세종 때의 유명한 청백사이던 문화인 좌의정 유관의 10대 후손으로서 1622연1월21일에 서울서부 정릉동 (정동)에 있던 외삼촌 참의 이원진 댁에서 태어나 자를 덕부, 호를 반계라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예문관검교를 지내던 유검이었고 어머니는 뒷날 그의 학풍을 계승한 성호 이익의 오촌숙모였는데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여 안광이 빛나고 얼굴이 넓고 키가 크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자람에 따라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어 위엄을 보이었다. 그는 5세 때부터 글을 외삼촌 또는 고모부 판서 김세렴에게 배워 이미 10세 때에는 사서오경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서에도 능통하여 그 두 스승을 놀라게 하였으나 뜻을 벼슬 얻는데 두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를 닦는데 힘썼다.

<맘대로 가져가라>
이러는 사이에 병자호란을 만나게 되니 15세이던 그는 맏아들로서 조부모와 모와 두 고모를 모시고 원주로 피신하다가 그 도중에서 수십명의 강도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그들에게 달려들어 말하기를 『사람이 누가 부모가 없으랴. 너희들은 나의 부모를 놀라게 하지 말고 물건들을 맘대로 가져가라』고 하니, 그들은 그 말에 감복하여 그냥 가버렸다 한다. 이어 호란을 치른 후 그 다음 해에 참판이던 조부가 부안으로 옮겨 살게되니 그는 이곳에 자주 왕래하는 한편 18세 때에는 철산부사한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3년 후에는 선친의 무덤이 있던 한강가의 지평현화곡리 (양주)로 옮아가 외아들 하을 낳게 하고 다음 해에는 남인이 많이 살던 여주 백양동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그는 함경도 감사를 지내던 고모부를 찾아뵈는 길에 올라 서북지방을 두루 살펴보고 다음해에 돌아왔는데 그가 23세이던 그해(1644)에 조모가 세상을 떠났다.

<불교는 이교라고>
그리하여 장손인 반계는 조모의 3년 상을 격식대로 마치고 26세 때에는 금천(시흥) 안양동의 불사를 찾아가 불사비후면에다가 불교를 이교라고 배척하는 글을 쓰고, 다음해 봄에는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피세지를 찾고 돌아왔는데 그해에 또한 모친을 잃었다. 여기서 그는 홀 할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29세 때에는 소과에 응시한 후 충청도 지방을 두루 다녀보고 다음 봄에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왔는데 그해 5월에 조부마저 잃게되었다.

<반계 수록 27권>
그러므로 그는 여러 가지 느낀 바가 있어 다음해부터는 우리 나라의 정치·경제·사회·교화·국방 등에 관한 글을 적기 시작하여 이후 19년 동안에 이른바 반계 수록 27권을 만드는 한편 많은 저술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어 그는 조부의 3년 상을 마치게 되니 32세이던 1653년 겨울에는 부안현 바닷가의 우반동으로 삶터를 옮겨 죽림사이에 초옥을 이룩하고 만권책을 벗으로 하여 서야로 저서에 몰두하며 때로는 논밭을 갈며 물을 대고, 맛있는 물고기와 게를 먹을 때에는 어버이를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다 한다.

<진사과 2등 합격>
그리고 다음 해에는 조부의 유명에 따라 진사과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이를 마지막으로 과거시험에는 발을 끊었다. 이때 그는 그 마을에 음사 세곳이 있어 원근남녀가 모여들어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보고 사람을 시켜 그 사자를 헐어버리게 하고 신나무를 베어버리게 하니 무고들이 다시는 드나들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36세 때부터 3년 동안에는 가을마다 호남지방을 두루 다녀보고 40세 때에는 다시 영남지방의 산천을 편관하고 잠시 서울 외가에 머물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는 사이에 반계는 명국이 멸망하게 된 것을 슬퍼하여 달밤에는 집 뒤 산정에 올라가 스스로 금을 탄하면서 북방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집에서는 준마를 기르고 가동들에게 양궁조총(소총)을 가르쳐 마을사람 2백여에게까지 미치게 하며 바닷가에는 큰배 4, 5척과 말 몇 마리를 매어두어 급한 때에 쓰게 하였다. 때마침 1667년 여름에 교무하려고 일본으로 가던 중국선 1척이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니 반계는 그 선원 진득들을 만나보고 그들로부터 명의 영력제가 아직 중국남방의 4성을 보유하고 있다 함을 듣고 즐거워하는 한편 슬퍼하였다.

<「대아근」을 예측>
그리고 그는 50세 때에는 혜성이 나타남을 보고 대아근이 닥쳐올 것을 짐작하여 미리 우마를 말아 오곡을 사두었는데 과연 그 해에는 전국이 대기하여 시체가 머리를 맞대고 유민이 길에 깔리게 되었으나 그 마을사람들은 반계의 사곡으로 이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뜻 있는 일을 많이 하던 반계도 1673년2월부터 병을 앓다가 3월19일에 52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5월에는 죽산(안성) 용천현도 산하에 묻히게 되었다.

<자녀는 1남 6녀>
그의 자녀로는 1남 6녀가 있었고 저서로는 반계 수록을 비롯하여 주자학에 관한 이기총론·논학 물리·경설문답·주자찬요와 역사에 관한 동국사강목조례·속강목의보·역사동국가고와 지리에 관한 여지지·지리군서·군현제·중흥위략과 언어에 관한 정음지남파 병법에 관한 무경사서초·기효신서절요와 선술에 관한 삼동계초와 문학 등에 관한 동국문사·도정절집·기행일록·서설서법이 있어 모두 20종 70여권을 헤아렸다. 그러나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은 반계 수록 27권뿐인데 이것은 학문을 사랑하던 영조가 그 46년(1770)에 이 책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경상도감영에 명하여 간행광포케 한데 말미암음이었다.

<「통정대부」 추증>
따라서 그해에 반계에게는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의 벼슬이 추이되었다. 반계 수록 27권의 내용은 전제8권, 교선 4권, 임관 2권, 직관 4권, 청제 2권, 병제 4권, 속편 2권, 보유 1권으로 되어있으니 만큼 전제의 개혁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반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토지는 천하대본>
『비록 원치의 임금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전제가 부정하면 민산이 마침내 떳떳하지 못할 것이요, 부역이 마침내 고르지 못할 것이요, 호구가 마침내 밝혀지지 못할 것이요, 군오가 마침내 정하지 못할 것이요, 사송이 마침내 끊이지 않을 것이요, 형벌이 마침내 덜하지 못할 것이요, 회뢰를 마침내 막을 수 없을 것이요, 풍속이 마침내 두텁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고도 능히 정교서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릇 그러한 까닭은 무엇인가, 『농지는 천하의 대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반계는 토지를 농민에게 균등히 분급하는 균전 제도의 실시를 주장하고 이에 따라 전세 공물부역 병역을 부담시킴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서리와 짝이들에게도 간급에 따라 토지나 녹과를 줌으로써 종래의 중간 착취를 근절게 하고 전국의 도읍을 폐합하여 관리를 도태하며 상공업은 농업의 피폐를 가져오지 않는 한도에서 적극 장려하며 주거와 대폐의 포용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계의 제도현혁설은 영·정조조에 이르러 성호이익·다산 정약용에게 계승되어 실학의 개화기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인진 같은 학자는 이들의 위채를 평하여 말하기를 『조선 근세의 학술사를 종합하여 보면 반계가 일조요, 성호가 이조요, 다산이 삼조이다』라고 하였다. <필자=서울대 교수·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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