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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색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어느 음악회에서 있다. 「바이얼린」독주가 끝나자 청중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귀부인하나가 백의의 노신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참 놀라운 솜씨지요』그 신사도 같이 감탄을 했다. 『그래요, 정말 놀라운 솜씨입니다. 불과 수 십분 동안에 3천5백63번이나 팔을 움직일 수 있다니!』 그 노신사는 수학교수였던 것이다. 「바이얼린」을 귀로 감상한 것이 아니라 팔운동을 계산하는 수학적 감상을 했던 셈이다. 음악을 음악으로 감상할 줄 모르는 비극은 비단 노 수학 교수의 경우만은 아니다.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공산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행진가요나 노동가요는 알아도 순수음악을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들. 음악까지에도 색채를 칠하여 「재즈」도 부르지 못하게 하는 적색소아병환자들 말이다.
음악을 「이데올로기」로 감상한다는 것은 마치 그것은 수학적으로 감상하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해영기」를 타고 공산권국가에서도 「예술의 자유」문제가 심각히 논의되고 있다.
한국의 재원 「첼리스트」정명화양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차이코프스키」국제 「바이얼린·첼로」경연대회에 참가하리라고 한다. 추연자는 세계적인 「첼리스트」이며 한국을 내방한 일도 있었던 「피아티고르스키」. 그러나 보통음악「콩쿠르」와는 달라서 정명화양이 과연 우승할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도 공산권 여행을 허락할 수 있느냐 하는 정치적인 관심이 먼저 앞서고 있다 소련에서 열리는 국제해양학총회에 한국대표를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과 아울러 이것은 색다른 문제를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문제는「피크닉」을 가느냐 마느냐하는 성질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기분만으로 해결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음악에는 색채」가 없다는 것이며 정치로부터 음악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국가의 자랑이라는 사실이다. 정명화양이 철의 「커튼」을 넘어「모스크바」 에 간다해서 그녀의 음악에 무슨 색채가 묻을 리는 없다. 도리어 예술의 자유를 증명하는 것이며 음악의 신은 「마르크스」 나 「엥겔스」의 손에 잡히지 않는 영원한 창조의 자유 속에서 울려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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