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북한 시론

박근혜, 한국의 닉슨이 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권만학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는 2월 25일이면, 닉슨 미국 대통령이 미·중 수교 합의를 성사시킨 지 꼭 41주년이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부터 증폭됐던 엄청난 적대성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중국을 방문해 상상조차 못했던 ‘적과의 동침’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닉슨의 방중은 깜짝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이후 그로 인해 야기된 세기적인 변화가 더욱 놀라웠다. 미국과 확보한 평화 속에서, 중국은 개방·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국경 너머에 등장한 새로운 적과 대적해야 했던 소련은 20년 후 붕괴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중 수교는 주·객관적 조건이 맞아떨어져 성공한 주요 국제정치적 사건이었다. 객관적으로 중·소 분쟁은 미·중 접근 가능성을 열어 줬으며, 주관적으로는 이념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지도층이 미국과 중국에 동시에 존재했다. 여기에 닉슨의 반공주의라는 허용적 요인이 성공의 마지막 보장이 됐다. 반공 투사라는 그의 명성은 미·중 정상화가 수반할 이념적 충격과 저항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줬다. 닉슨이 공산주의자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인 중국 당국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고, 협력의 길을 열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2013년, 한반도 내외는 엄청난 격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북한은 두 차례의 핵실험과 최근의 장거리 로켓 은하-3호 발사에서 보듯이 핵군사화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갈등에서 보여지듯이, 중국은 더욱 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도전할 것이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지역 갈등이 한반도 내부 갈등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비극에 있다. 박근혜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더욱 남북 관계 개선을 핵심 과제로 떠안게 됐다.

 때로는 신사고가 역사를 바꾼다. 북한의 핵군사화는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한국과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대응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핵 후원국을 잃고 재래식 군사력에서는 추월 불가능한 안보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비대칭적 핵군사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한국과 미국에 의해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활적 불안감이다.

 문제는 해결책이다. 북핵 문제는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핵무기와 수도권을 타격할 수 있는 북한 포병 능력을 완전히 궤멸시킬 수 없는 한, 어떠한 군사적 해결 노력도 천문학적 피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즉 북핵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는 없다. 또한 북한의 뒷문이 중국 쪽으로 열려 있는 한, 북한을 정치경제적으로 교살시킬 수도 없다. 중국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이후 보여 준 것처럼 북한체제 유지를 주요 국가 이익으로 간주하면서 북한의 손을 잡아 주고 있는 한 대북 제재라는 게 아무런 효과도 못 거두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한반도포럼’은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함으로써 위에서 제기된 북한의 위기감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동시에 비핵-평화-협력이라는 3중추 대북정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북한이 ‘반국가 단체’로, ‘침략자’로 남아 있는 한 북한의 안보는 근본적으로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유엔과 유럽의 많은 선진국이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한국만 모르고 있다는 외국 학자들의 지적은 실로 통렬하다. 북한의 국가성이 인정될 때, 비로소 비핵-평화-협력의 길은 열릴 것이다.

 이 길이 반드시 성공에 이르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외교안보 정책의 기본 수칙인 신중성을 바탕으로, 치밀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낸다면 원하는 계산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 정부들은 이념적 편향으로 인해, 작지만 열려 있는 이 기회의 창을 포착해 내지 못하거나 무시해 버렸다. 닉슨 행정부처럼, 보수 정권인 박근혜 정부야말로 오히려 국민의 미래 이익을 위해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주·객관적 여건을 제대로 활용해 획기적 남북 탈냉전화를 성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권 만 학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