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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와이키키 브라더스

중앙일보

입력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일자리가 사라진 식자공, 자동 개찰기에 밀려난 지하철 역무원, 그리고 '초(秒) 경영'에 터전을 뺏겨버린 '잉여'노동력. 자본과 기술의 '퇴물''퇴출' 공세를 최근의 한국 사회는 어느 때보다 숨가쁘고 처절하게 겪고 있다.

임순례(40)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노래방 기계의 등장, 업소의 불황으로 소용을 잃고 쇠락한 밤무대 밴드를 따라 간다.

이들은 한 때 '야간 업소의 비틀스'라 불렸으나 서울에선 더 이상 찾는 이가 없어 유랑하듯 지방으로 떠돈다. '고추아가씨 선발대회' 같은 행사에서 반주를 하거나 잔칫집 흥을 돋아주고 '몇 푼'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생계가 막막해진 멤버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주인공 성우(이 얼) 의 고향인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정착'했을 땐 달랑 세 명만 남는다. 고등학교 시절 롤링 스톤스와 퀸을 꿈꾸었던 고향. 여기서 영화는 잠시 이들의 성장기를 얘기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뭉쳐 만든 그룹사운드. 여름철 해변에 천막을 치고 자신들의 음악을 들려주려는 이들에게 지나가던 여학생이 묻는다.


'밴드 이름이 뭐에요?'. 얼떨결에 나온 답이 '와이키키 브라더스'. '야자수 늘어진 하와이 해변에 하얀 보트가 달리고 다리 쭉쭉 빠진 미녀들이 넘치는 곳' 와이키키. 1970년대말에서 80년대 초 무렵.

모든 개성은 군사 정부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통기타와 드럼은 그 답답한 시절을 견디게 하는 도피구이자 환기창이었고 '와이키키'는 그들이 갈구하는 환상의 섬에 대한 다른 이름이었다.

5년전 앞날이 막막한 10대 후반의 초상화인 '세친구'로 데뷔했던 임 감독은 전작처럼 사회의 비주류에 대한 응시를 거두지 않는다.

목욕탕 때밀이 아가씨에 연정을 품지만 동료에게 애인을 뺏긴 뒤 대마초에 몸을 맡기는 드럼치는 강수(황정민) , 여자를 꼬시는데 능하지만 결국엔 친구를 배반하지 못하고 꺼이꺼이 울어대는 오르간 연주자 정석(박원상) , 술에 빠져 살아도 평생 지미 핸드릭스의 음악을 흠모하는 '분단의 희생자' 음악학원 원장(김영수) , 무대에 서고 싶어 밴드를 기웃거리는 웨이터(류승범) .

영화는 옥슨 80의 '불놀이야'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 등 70, 80년대의 인기곡들을 중간중간 배열함으로써 자칫 무겁고 너절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경쾌하게 이끌어간다. 게다가 풍부한 에피소드들을 스틸 사진이 재빨리 넘어가 듯 속도감있게 밀어 부쳐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만들었다.

어깨 축 늘어진 주인공이 시장통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부감 숏으로 잡은 '세친구'의 라스트 신에 비해 '와이키키'의 마지막 장면은 훨씬 낙천적이다. 번쩍이는 금빛 의상을 입은 왕년의 학생 가수 인희(오지혜) 가 여수의 밤무대에서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간드러지게 부를 때 관객은 연민과 희망을 동시에 품게 된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넉넉한 포용에도 불구하고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드는 건 그것을 넘는 비전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비루한 우리네 삶을 세밀화처럼 묘사한 건 좋았지만, 노스탤지어를 앞세운 작품들이 흔히 빠지는 애상(哀傷) 조가 돼 버려 아쉬운 거다.

기왕에 현실의 단면을 베어내 해부하기로 작정 했다면 좀 더 깊고 치열하게 사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다.

특히 구청 건설계와 환경운동단체에서 일하는 두 동창을 대립시키는 장면에서 그런 한계가 읽힌다.

'학창 시절의 우정도 현실의 벽에 막히면 변질된다'는 이야기를 하려한 것이겠으나 평면적이고 상식적인 얘기 아닌가.구청 직원인 동창이 자살하자 상가(喪家) 에서 환경운동가가 비탄에 잠기고 성우가 술상을 뒤집는 부분은 마치 '사회적인 활동이나 발언이 우리네 개인의 삶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 것이냐'고 토로하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영화 속 한 장면. 성우와 인희가 등을 보인 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망연히 앉아 있다. 세월의 흐름에 속절없이 던져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개인을 떠받치는 역사의 물결은, 영화 중간에 홀연히 사라진 학원 원장처럼, 영화에서 끝내 흐르지 않았다. 내달 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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