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도청의혹 덮고 갈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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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 정치에는 독특한 문화가 하나 있다. 대선이나 총선, 지방선거 등 큰 선거가 끝나면 그 과정에서 벌어진 고소.고발이나 대형 이슈를 없었던 일로 덮고 지나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대선이 끝나자마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수십건의 고소.고발을 취소하기로 했다.

*** 大選 끝나 유야무야 분위기

고소.고발이야 정치인들의 쇼맨십이라고 치자. 국민적 관심사였던 대형 의혹사건마저 고소.고발과 마찬가지의 해법을 답습하지 않나 우려된다. 이 문제들은 단순한 국민의 '알 권리'차원을 넘어서 인권과 정권의 도덕성 문제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대형 의혹은 '신병풍(新兵風)사건'과 '현대의 4천억원 대북 비밀지원 의혹', 그리고 '국정원의 정치인.언론인 불법도청 의혹'등이다.

병풍사건의 주인공 김대업씨는 13일 출두했지만 검찰이 의혹을 제대로 밝힐 의지가 있을지 의문이다. 대선기간 중 金씨는 지지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 때론 '의인(義人)', 때론 '희대의 사기범'이 됐다. 이제 모든 의혹을 제대로 밝혀내 이를 잘못 보도한 언론과 억지를 쓴 정당이 공개적으로 사과하게 만들어야 한다.

4천억원 대북비밀지원 의혹은 한 술 더 뜬다. 의혹의 중심에 있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4개월여 미국에 '잠적'했다가 대선 후 귀국한 뒤 13일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鄭회장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어떻게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개발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래서야 새 정부의 대북정책도 투명성 시비와 남남갈등에 휘말려 파행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20여일 지났지만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은 도청의혹이다. 국정원 도청이 사실이라면 국민의 기본권을 정면으로 침해한 것이며, 정치와 언론의 활동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이 의혹은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되자마자 한나라당이 제기했다. 수십명의 정치인.언론인의 전화 도청내용이 공개됐다. 공개된 분량의 몇십배를 한나라당이 갖고 있다. 선거기간 중엔 미뤄놨다고 치자. 이젠 대선이 끝난 만큼 사실을 밝혀야 한다.

한나라당 주장처럼 국정원이 불법도청의 배후라면 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이 뒤따라야 한다. 정부 주장처럼 한나라당이 사설도청단을 만들어 자작극을 벌였거나, 증권가 정보지를 재가공한 것이었다면 한나라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국정원의 정치인 도청은 없다"고 했다. 한나라당과 정부 어느 쪽인가는 국민을 상대로 일종의 '사기극'을 벌인 셈인데 그냥 넘어가서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검찰도 국정원도 유야무야 하고 있다. 한나라당도 추가 자료를 내놓거나 조사를 촉구하지도 않는다.

임채정 인수위원장은 13일 '국정원의 국내분야 도청 등에 대한 국민거부감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 "국민감정이 그렇다고 모두 다 없앨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도청의혹을 규명할 수 있는 모든 주체들이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담합이라도 한 것일까.

*** '국민 사기극' 진위 밝혀야

국정원의 국내정치 사찰로 피해를 본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엔 한결같이 국정원에 의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졌다. 정보란 그만큼 매혹적이며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원칙론자이며 기성정치로부터 자유롭다고 국민은 믿고 있다. 도청의혹 같은 것을 말끔히 털고가는 것이 盧당선자다운 길이다. 그래야 새 정부가 국민의 신뢰 속에 출발할 수 있다.

김두우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