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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만드는 ‘나부터 혁신’ 주인공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전북 전주 풍남동 남부시장 ‘청년몰’ 창업자들이 패기 있고 발랄한 모습으로 사진 촬영에 응했다. 이들은 지난 5월 칵테일바, 멕시코 요리 전문점 등 18개 점포를 동시 개장해 젊은 층을 재래시장에 끌어모으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형철·임영규·강명지씨, 사회적기업 이음 김병수 대표, 김은홍·이철희씨, 이음 이승미 실장, 정은미씨(한가운데). 전주=조용철 기자

내전과 학살로 얼룩진 시에라리온 어느 마을의 캘빈 도(15). 소년은 일주일에 하루만 전기가 들어오는 고향에 빛을 끌어오기 위해 쓰레기 더미의 폐부품들로 배터리를 만들고 FM 송신기까지 개발했고, 주민들에게 음악과 뉴스를 전했다. 미국 MIT대학은 이 소년을 초청해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빈국의 작은 혁신 사례를 들었다. “이제 풍력발전기를 만들어볼 겁니다. 미국에서 배운 것으로 마을을 위해 뭔가 또 해야죠.” 소년답지 않은 진지함과 끊임없는 도전 열망이 유튜브에 동영상으로 올려지자 전 세계가 열광했다.

부산시 사하구 가파른 산비탈의 ‘감천문화마을’. 1950년 한국전쟁 때 신흥종교 신앙촌으로 시작해 2년 전까지 달동네였다. 그런 곳에 젊은 예술인들이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올리고 공연장·미술관을 세우면서 한 해 10만 명이 찾는 부산의 대표적 볼거리가 됐다. 김성천 주민협의회장은 “서울의 달동네 재개발처럼 전면 철거 방식이 다가 아니다. 얼마 전엔 아프리카 탄자니아 공무원들이 찾아와 도시 재생의 성공 사례라며 배우고 갔다”고 말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시에라리온 소년이나 통째로 예술작품이 된 교외 산비탈 감천마을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부터 혁신하겠다’는 보통사람의 각성에서 비롯됐다. 사소한 생활 속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나와 주변을 바꾸고, 세상 혁신에 일조하는 ‘이노베이터(innovator·혁신가)’가 그들이다. 이제 변화나 혁신은 애플·구글·삼성 같은 글로벌 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크고 작은 혁신의 선봉에 서고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일상의 불편이 아마추어 발명가를 통해 히트 상품이 되는 사례가 양산되고 있다. 선풍기 날개와 진공청소기 봉투를 없앤 히트 제품을 내놓아 ‘영국의 잡스’로 불리는 제임스 다이슨 회장.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는 ‘5126’이라는 별칭이 있다. 그만큼 실패를 거듭하고 5127번 도전 끝에 성공했다. 공동체의 혁신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홍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는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실력이 부족해도 누구나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 소년에겐 선생님과 교재조차 없었지만 쓰레기 더미를 뒤져 건져낸 부품으로 동네 이웃에게 문명의 이기를 선사했다. 또 무명 화가가 중장비 아닌 붓과 물감으로 좁고 어두운 달동네를 예술마을로 탈바꿈시켰다.

혁신이란 말에 실린 과도한 무게와 심각함을 덜어야 한다. 혁신 하면 천재나 전문지식, 첨단과학을 연상하는 건 고정관념이다. ‘혁신(innovation)’의 어원이 무겁기 때문인가. ‘가죽(革)을 벗겨 새롭게(新) 한다’는 뜻이 사뭇 진중해 보통사람은 범접하지 못할 것만 같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우란 수석연구원은 “큰 혁신 사례 중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 생활 속에서 발견한 아이디어가 많다. 첨단 기술까지 들어가지 않고도 혁신을 통해 우리 삶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뉴욕선 채소 기르는 ‘윈도팜’ 인기
세계 최대 도시 미 뉴욕. 요즘 이곳에선 채소를 길러 먹는 윈도팜(window farms·창문농장)이 인기다. 이런 발상은 브루클린에 사는 브리타 라일리(33)라는 사람한테서 나왔다. 창문 밖 좁은 베란다에서 1.5L 생수병으로 작은 밭을 가꾸고 유기농 채소를 길렀다. 그 경험을 인터넷에 올리자 4만여 명이 회원으로 등록했다. 그 뒤 배 위에서 농사짓는 ‘선상 농장’, 텅 빈 옥상을 밭으로 바꾼 ‘옥상 농장’ 등 도시형 유기농 농사가 확산됐다.

이런 ‘생활형 창조자’에겐 공통점이 있다. 나이·성·학력에 구애받지 않고 삶터와 일터가 아이디어의 무대며, 늘 ‘왜’라고 질문을 해대고, 큰돈 들이는 실험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주유기에 자석을 붙인 발명도 그렇다. 몇 해 전에 한 여중생은 주유소 알바로 일하는 오빠한테서 “경유 수입차에 휘발유를 잘못 넣는 혼유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주유기와 주유구에 서로 밀어내는 자석을 다는 아이디어로 한국 청소년 발명경진대회 대상을 받았다.

혁신가는 또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일에 ‘무한도전’한다. 아파트촌과 학원가로 빽빽한 부산시 남천동의 초록지붕 4층 건물 ‘인디고서원’. 25일 성탄절 연휴라 골목길은 한산했지만, 이곳은 중·고생들의 얘기 소리로 활기를 띠었다. 마당 벼룩시장에서부터 인문학 서점, 토론·스터디룸이 학생들로 꽉 찼다. 정보기술(IT) 발달이 출판업계에 오히려 시름을 안기고 있지만 이곳은 지방의 청소년들에게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는 현장이다.

인디고서원은 큰 언론사나 대학·연구소 아니면 엄두도 내기 힘든 해외 유명 석학과의 교류를 척척 해내고 수준 높은 대담집까지 내고 있다. ‘배경’도 ‘줄’도 없는 젊은 학생들이지만 국내외 석학들에게 꾸준히 e-메일을 보내는 진정성이 그 석학을 움직이곤 했다. 박용준(29) 편집장은 “새해에는 이탈리아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과 만난다”고 했다. 지난해 슬로베니아에서 급진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와 인터뷰한 것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란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올해도 일본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과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학생들이 찾아가 만났다.

이원호·이태경·강나현 기자 이나리 은행권청년창업재단 기업가정신센터장 llhl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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