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길(박목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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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이야
필설로 다 할 수 없었다.
태어나는 그 날부터
가슴에 서리기 시작한 것
얼굴을 문지르며
논두렁길을 걷는다.
따지고 보면 밑도 끝도 없이
다만 가슴에 얽혀
늘어나는 주름살을 쓰다듬으며
논두렁길을 걷는다.
아무리 따져도 아귀가 안 맞는
그것이 인생이거니 체념한
씁쓸한 얼굴을 찌푸리고
논두렁길을 걷는다. ,
논두렁길은 꼬불꼬불 뻗쳐
마을과 마을을 잇는다.
때로는 안개에 서려 보름달아 뜨면
실로 호젓한 걸음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얼굴이
한국의 논두렁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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