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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치명상 「기성세대」의 열등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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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문화>
한·일 국교가 열려 문화교류의 길이 틔었다. 정치·경제적 침식과 더불어 문화적 침식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여론이 높다. 일본 문화의 침투에 대해서 특히 경계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서구문화의 천박한 아류에 불과한 일본의 현대문화에 우리가 특히 약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근대는 서양에 의한 정복으로 비롯했다. 동양제국이 모두 식민지, 반식민지로 되었을 때 오직 일본만이 제국주의국가로 발전했다. 일본은 서구열강의 뒤를 쫓아 오늘날 어느 정도 흉내내기에 이르렀다. 서양표준에서 볼 때 「우등생」이 된 셈이다.
그러나 「후진아시아」를 탈피해서「준 서구식 1등국」이 됐다고 해서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 문화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외래문화가 잡거해 있는 일본의 근대문화는 「모방과 전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지금 세계문화의 시계에서 볼 때 별것 아닌 일본문화의 침식을 우려하게 되는 것은 우리문화의 체질적 취약성 때문이다. 우리문화와 일본문화의 관계는 후자와 서구문화의 관계와 비슷하다. 한국의 근대화가 그들의 식민지통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리문화의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건 소극적으로 건 저항했던 세대는 점점 사라져가고, 현재 지도적 지위에 있는 기성세대는 거의 식민지교육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식민지 「인텔리」의 특징은 종주국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해방이 우리민족의 힘으로 이루어졌던들 이런 식민지적 잔재는 뿌리뽑혔을 것이다. 우리의 기성세대가 일본문화의 영향에 대해서 당당하게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그 가치를 가늠질 함으로써 젊은 세대를 올바르게 지도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 이에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것은 소위 「근대화 이론」에 대한 맹신경향이다 경제의 발전단계에만 의거하여 제 민족의 역사를 비교하는 소박한 단선형적 발전단계론이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 「한국문화는 일본에 50년 뒤졌다」「선진국의 원조와 지도 없이는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런 정신적 태세에서 주체성을 부르짖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떠들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당초 싸워볼 마음이 없으니 패배가 있을 리 없다.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일어강습소를 금지 또는 허가하자는 정치가, 왜색조 가요방송을 금지하자는 지식인 이들은 모두 지속적인 문제를 가지고 떠들어댐으로써 진정한 저항의 「이슈」를 은폐시키는데 힘쓰고 있다.
「트위스트」「고고」가 판을 치고있는 마당에 왜색조가 끼여든다고 해서 큰 문제될 것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정신풍토 속에 아직도 은연중에 복재해 있는 식민지적 잔재를 없애는 데 있다. 보다 무서운 것이 우리 자신 속에 있다.
밖으로만 팔려있는 눈길을 안으로 돌려 철저히 우리 자신을 비판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높은 이상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것이 주체성확립의 길일 것이다. 학생과 일부 지식인의 한·일 협정반대투쟁은 얼핏 실패로 끝난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 국민의 민족의식을 진압시켰다.
이 운동에서 나타났던 민족주의적 「에너지」가 결집되어 뚜렷한 지표를 향해서가게 될 때 일본문화의 침식쯤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문화 조류의 변방에 서있다고도 할 우리로서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일본을 문화수용의 운하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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