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윤이 엄마를 빨리 돌려보내달라" 서도납북어민 가족 치고 누구하나 딱하지 않은 점은 없다.
저마다 부모형제들 빼앗긴 집들. 모두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볼음도 사람들은 [창윤]네집 걱정을 제 걱정에 앞세웠다. 집집마다 이런 애화들이 조개껍질처럼 흩어져있는 볼음도.
지난번 함박도 앞 갯벌에서 납북된 1백12명 어민 속에는 눈멀고 두손 없는 장남 (박창윤·19)과 창순(여·13·볼음교5년) 창복 (남·9·볼음교2년)군 등 어린 3남매를 벌어 먹이려 조개잡이 나섰던 홀어머니 (안정숙·43)도 끼여있었다.
3남매의 아버지는 막내아들 창복이 태어나기 전 가난에 몰려 돈벌러간다고 집을 나간 뒤 생사를 모른다.
어머니는 10년간 날품팔이 굴따기 등으로 어린 3남매를 길러왔다. 금년 가을 들어 벌이가 좋다는 굴따기에 처음 나선길이 [적지]로 붙잡혀가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그날 새벽 "창윤아, 실망말고 조금만 견뎌라"면서 돈벌어 손(의수)을 마련해 주겠다고 나갔단다. 그날 밤 뜬눈으로 지새워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낮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어민납북사고[뉴스]를 듣고 [창윤]군은 방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울면서 기도했단다. 어머니가 죽은 줄만 알았다. 옆에 있던 동생 창순양은 영문도 모르고 "오빠, 기도 그만하고 밥먹어!"하면서 찐 고구마를 상에 차려왔다.
그 다음날에야 어머니가 죽지는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창윤군은 너무나 기뻐 몇번이나 길을 헛 짚은 끝에 교회로 달려갔다.
미친 사람처럼 종을 울렸다. 손이 없어 팔목에 줄을 감고 입으로 물어 몇시간을 울렸는지 모른다. 동네사람들이 몰려 나왔을 때 창윤군은 얼굴이 줄에 긁혀 정신없이 쓰러져 있었단다.
창윤군은 재작년 여름바닷가에서 동네어린이들이 주워온 엄지손가락 만한 폭발물을 만지다가 터져 두눈이 실명하고 손을 잘렸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4년간 남의 집에 품을 팔다가 뼈도 긁어지고 노동에 자신이 생겨 이젠 배를 타서 어머니의 어려움을 도와 드리겠다고 나선 며칠 뒤의 일이었다.
몸을 상한 뒤 [어머니에게 또 하나의 십자가를 매게 한 죄인]임을 깨닫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창윤]군은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네번 교회에 나가 어머니가 무사히 빨리 돌아오시도록 기도 드린다. 오후에 동생들이 학교서 돌아오면 함께 마을 앞 바닷가바위에 올라가 어머니가 탄 배가 오지나 않을 까고 북녘 수평선을 지켜보는 것이 일과가 되어있다. 볼음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어머니바위]라 이름 불렀다. "창윤이 엄마라도 먼저…"돌려보내 달라는 애소가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서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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