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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의 한·월 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 나라와 월남과의 역사적 관계는 정사에선 비치지 않는다. 지리적인 거리도 거리려니와 [내셔널·인터레스트]가 얽히고 설킬 겨를조차 없었다. 통일신라 이후 선박의 발달과 불교의 융성으로 고승들이 인도로 유학함에 동남아로 통하는 해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므로 교통이 전무하였다고 할 순 없다.
또 13세기 고려조 때에 안남왕자 이용상이란 이가 우리 나라에 망명 귀화하여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한 가닥의 흔적을 민속학자인 최상수씨가 주장하고 있다. 최씨는 황해도 옹진군 일대에서 볼 수 있는 그 사적까지 지적하고 있다.
고려 고종 때, 송이 망하고 원이 흥할 무렵 안남의 왕조가 권신인 진씨 일족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왕자인 이용상은 망명의 길을 떠나 표류-. 어쩌다 고려국 옹진현 (지금 황해도 마산면 화산리) 에 떠밀려 왔다는 것이다.
그후 [지봉선생집]에서는 또 하나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598년 이조 선조30년 정유겨울 이수광은 명나라 황극전 화재로 진위사가 되어 연경갔을 때 안남사신 풍극관과 같은 객관인 옥하관에서 50일이나 머무르는 사이에 서로 친교가 두터워 졌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들은 서로 시로 창수하고 필담으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수광이 안남사신에게 『귀국은 겨울에도 여름처럼 따뜻하고, 얼음과 눈이 없다는데…?』라고 묻자, 『봄이 많고 겨울이 적다』고 화답-흐뭇한 우정의 밀도를 얘기해 준다. 뜻하지 않은 표류로 우리 나라 사람이 안남 땅을 디딘 일도 있었다. 이조 숙종 정묘년에 제주도 사람이 안남에 표류하여 그곳에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온 일이 정동유의 [화영편]에 기록되어있다.
이보다 앞서 임진난 당시 1579년 일본에 포로가 되었던 진주인 조완벽은 글에 능한 탓으로 일본의 남방무역선에 편승할 기회를 얻고 안남을 왕래하다 귀국한 일이 있다. 그밖에도 포로 중에는 외국의 무역선에 팔렸다가 월남의 [통킹]국에서 제왕의 시녀로 있던 한국의 여성이 있었고 화란인의 대[통킹]국외교·무역에 활약한[우르슬라]라는 걸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의 역사 기록에 남아있다.
이처럼 한국과 월남과의 관계는 [우연한 일]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정사의 그것은 아니었다. 월북한 사학도 김모가 한·월간의 역사적 관계를 전공했으며 우리 나라 사학자들도 그 역사적 고찰엔 별관심이 없을 정도. 최상수씨만이 그에 관한 논문을 몇 편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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