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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본모습」이 드러났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김지하씨 제명은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본지는 제명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소설가 이창동씨의 기고를 전재(19일자 문화면)한데 이어 제명 이유를 밝히는 이오덕씨(아동문학가·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의 글을 싣는다.【편집자주】
민주주의를 외치는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어 가고 있다. 최루탄에 맞고 쇠파이프로, 혹은 스스로 몸을 불태워 죽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자살하는 경우 엄밀히 따져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 해야 옳듯이 70, 80세 노인들의 자살 역시 타살이라 할 수 있듯이, 스스로 몸을 태워 죽는 젊은이들의 죽음도 죽임을 당한 것이다. 민주를 가로막는 힘이 그들을 죽였다. 그리고 민주사회를 만들어 주지 못한 우리 어른들 모두가 그들을 죽인 공범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분신 자살을 두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하도록 부추겼다고 말하는 글쟁이가 나타났다. 도무지 말이 될 수 없지만 이런 궤변을 예사로 발표하는 사람이 행세하는 세상이니까 젊은 목숨들이 자꾸 죽어간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인데 누가 죽으라고 해서 죽겠는가. 부추김을 받고 죽었다면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어째서 그 기막힌 죽음을 욕되게 하는 말을 예사로 할 수 있는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나는 의심한다.
지난해부터 여러 글쟁이들이 흔들흔들했다. 몸을 바꿔 앉을 속셈이라면 혼자 그렇게 하면 될 일이지 공공연히 공개하고 다닌다.
분명히 어떤 계산으로 하는 일이다.
시인 김지하씨는 변신했는가. 아니다. 내가 보기로 그는 본 자리에 돌아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연재하고 있는 자서전을 읽어 봐도 환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를 잘못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민족 문학 작가들 모두가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문학, 쓰고 있는 글에 대해 깊이 살펴보게 하는 교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짧은 글에서 김씨의 문학을 비판할 수 없다. 또 그런 일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김씨를 포함한 여러 문인들의 변신, 또는 제자리 찾아들기의 근본 까닭을 밝히는 일이다.
내가 알기로 최근 여러 글쟁이들의 이상한 몸 바꿈은 소련과 동쪽유럽 사회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어째서 공산진영 국가들이 달라진다고 한국의 지식인들이 어리둥절해서 그 몸가짐이 흔들거리는가. 그것은 우리 한국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바탕이란 것이 어디서 왔는가를 잘 말해준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체계는 모조리 책에서 얻어낸 것이다. 책만 읽고 자라났고, 책만 읽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책에서 얻은 사상을 굳게 제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런 관념의 체계가 그만 소련과 동쪽 유럽의 현실에서 무너지고 보니 정신을 지탱하던 줏대가 없어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책과 글쓰기로 살아가면서 큰소리 잘 치고 근사한 이론 늘어놓기 잘하는 지식인들의 숨길 수 없는 실제 모습이다.
문제는 많은 지식인들이 삶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고 방안에서 글만 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느낌과 생각을 가지려면 아무래도 흙을 파든지,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든지, 거리에서 장사를 하든지, 어쨌든 같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땀흘리고 일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알고, 정치를 바로 보고, 역사를 제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방안에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하면서 글을 쓰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백성(민중)의 한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생각을 가질 수 없다. 몸 바꿈한 문인들의 행동은 이래서 모두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작가회의가 김지하씨를 제명한 일에 대해 김씨 자신은 작가회의에 입회한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작가회의의 어느 회원 한사람이 이 일로 충격을 받았다면서 표현과 양심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글을 썼다. 한사람이 한 말은 표현과 양심의 자유가 되고, 더 많은 사람의 말은 표현도 양심도 아니란 말인가. 그것은 파시즘의 궤변이다. 나는 작가회의가 민주를 배반하는 상식이하의 글을 멋대로 발표하는 사람까지 너그럽게 안고 있는 그런 흐리멍텅한 단체라면 마땅히 민족문학이란 간판은 내려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계꾼들의 모임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단체에 회원으로 남아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부터 당장 발을 끊을 것이다.
작가회의는 민족과 민주란 알맹이를 가진 작가들이 모인 단체다. 민족·민중·민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실천문학의 마당이 작가회의다. 명백히 모순을 지닌 현실에 대하여 투철한 의식과 문학으로써 대항하는 단체가 작가회의다.
이러한 작가회의 정신의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라면 하루빨리 제 갈길을 찾아 날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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