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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사교육 1번지, 대치동은 어디로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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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학원가<하> 교육 정책 20년사로 본 대치동

대치동은 밤 10시에 가장 북적인다. 학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오는 시간이다. 도로는 이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몰려든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1000여 개의 학원과 교습소가 모여있는 ‘사교육 1번지’ 대치동. 대치(大峙)란 넘기 힘든 큰 고개란 의미다. 이곳에 있던 큰 돌산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오늘날 대치는 다른 뜻으로 읽힌다. ‘SKY’, 즉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상위권 대학 입성을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자 인생 초반의 큰 고개가 됐다. 이곳에 학원가가 형성된 건 1990년대 초반부터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치동이 ‘입시의 해법’으로 통하는 이유가 뭘까. 사진은 지난 18일 밤 10시 무렵의 대치동 풍경.

대치동 키운 건 8할이 공교육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대치동에는 선망과 질타의 시선이 교차한다. 학벌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대치동은 명문대로 가는 관문을 넓혀주는 희망의 공간이다. 반대 의견도 있다. 서민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로 자녀의 성적까지 바꾸는 ‘치맛바람’의 산실이자 공교육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아왔다. 최근 몇 년간 정부가 내놓은 교육 정책이 ‘대치동 사교육 억제’에 초점을 맞춰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요즘 특목고와 대학의 입학 전형 방법이 달라지면서 대치동 학원가는 주춤하는 분위기다. 사교육을 잡겠다는 입시 정책이 정말 주효한 걸까. 그렇다면 ‘과외·강의 통합형 학원’이나 ‘영재 아동 대상 과학·논술학원’ 등 여러 형태로 변형돼 학부모의 관심을 끄는 대치동의 새로운 학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교육 정책이 어떻게 바뀌어도 대치동에선 일주일 안에 최적의 대안을 내놓는다” “학교는 못 믿어도 대치동은 믿는다”는 신뢰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 대치동 학원가의 지난 역사를 정리하며, 이곳이 우리 교육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폈다.

70~80년대 명문고 이전으로 ‘강남 8학군’ 형성

대치동 학원가가 형성될 수 있었던 토양은 ‘강남 8학군’ 형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고·서울고·휘문고·세화여고·진선여고·숙명여고 등 명문 학교가 강남·서초구 일대, 더 구체적으로는 대치동 인근에 자리 잡은 것이다.

8학군 학교들은 1980년대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행된 때부터 1992년 외국어고·과학고 등 특수목적고가 인기몰이할 때까지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자신을 ‘강남 8학군 1기’라고 말하는 한모씨는 “내가 S고등학교를 졸업하던 84년 우리 학교에서만 서울대 80명, 연세대와 고려대에 각각 100명씩 들어갔다”며 “우리 반 정원 60명 중에 서울대만 9명, 연고대와 서강대에 20명이 합격했을 정도라 연일 ‘강남 8학군’이 언론의 톱 기사로 올라왔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사교육의 중심지는 대치동이 아니었다. 김영규 영재수학학원 원장은 “송파의 씨알학당·장학학원, 압구정의 수림학원이 인기였다”고 전한다.

대치동 학원가가 형성된 건 ‘눈 밝은’ 학원들이 하나둘 옮겨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김 원장은 “학군 밀집도를 보니, 대치동이 교육 1번지가 될 것 같았다”며 “내로라하는 명문고가 모여 있고, 주변 아파트에는 강남 8학군 입성을 노리고 들어온 교육열 높은 학부모로 가득 차 있으니 학원을 차리기 최적의 조건이 갖춰졌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90년대 초 특목고 입시에 발빠른 대응, 전성기 시작
고난도 지필고사 보는 자사고·국제중 늘면서 수요 폭발
수능 위주 대입으로 지방학생까지 모으며 전국적인 영향력

90년대 교육 다양화 정책…외고·자사고 입시반 인기

대치동 학원가가 전성기를 맞은 건 84년 대원외고와 대일외고를 필두로 외국어고가 하나둘 늘었고 92년 이 학교들이 ‘특수목적고’로 인가를 받으면서다. 설립 당시만 해도 외국어고는 지금과 같은 특목고가 아니라 ‘각종학교’로 분류돼 대안학교의 성격을 띠었다. 대원외고 1기인 최모씨는 “외고는 좋은 대학에 가려는 상위권 학생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단지 외국어가 좋아서 입학한 친구들이 모인 학교였다”며 “국어나 과학 시간에도 선생님이 우리말로 설명한 내용을 영어로 필기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외고가 입소문을 탄 건 ‘스파르타식’ 수업 방식이 알려지면서다. 최씨는 “영어 지필고사만으로 입학생을 뽑다 보니 입학생 간 성적 격차가 컸다”며 “학교에서 매일 오후 11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시켰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고교평준화 이후 문과 학생이 진학할 만한 엘리트 학교를 찾던 학부모와 학생들이 외고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92년 특목고로 인가를 받자 외고 경쟁률은 더욱 치솟았다.

상위권 자녀를 둔 학부모의 수요를 빨리 읽은 대치동 학원가엔 일찌감치 외고 입시반이 마련됐다. 수학은 페르마학원, 영어는 이지어학원·정상어학원·최선어학원이 큰 성공을 거두며 대치동 성공 신화의 신호탄을 쐈다. 김현정 디스쿨 대표는 “당시엔 ‘특목고 합격=페르마학원’이라는 공식이 공공연하게 회자됐다”고 얘기했다. 그는 “페르마의 첫 수업은 오전 4시에 시작했고, 마지막 수업은 다음 날 새벽 2시에 마칠 정도였다”며 “새벽 4시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아침 일찍 공부를 시작하니 뇌가 활성화돼 좋다’고 얘기하는 분위기였다”고 얘기했다.

2000년 이후엔 경기·인천 지역에 외고가 9개 더 설립됐다. 경인지역과 서울지역 외고 사이의 경쟁도 본격화됐다. 학교마다 상위권 중학생을 끌어모으기 위해 지필고사 수준을 높였다. 그에 따라 특목고 입시 학원가는 더욱 문전성시를 이뤘다. 여기에 2002년 민족사관고·포항제철고·광양제철고 등 자립형사립고가 세워지면서 대치동 학원가는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일부 대치동 학부모들의 목표 학교가 ‘대원외고’에서 ‘민사고’로 수정됐다. 특목고, 자사고 등 엘리트 교육을 표방하는 학교가 늘어날수록 특목고 대비 학원가로 몰려드는 인원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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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청심중 개교 … 초등생 대상 입시 교육 열풍

2006년 청심국제중이 개교하고 2009년 대원국제중과 영훈국제중이 잇따라 문을 열자, 사교육을 시작하는 연령도 대폭 낮아졌다. 개교 당시 대원국제중은 iBT 90점, IET(국제영어학력경시대회) 4급 이상, 영어 원서 20권, 한국어인증시험 점수와 한자인증시험 점수를 1차 서류전형 요건으로 내걸었다. 대원국제중 1기의 입학 경쟁률은 20.6:1, 영훈국제중은 10.6:1이었다. 이미애 샤론코칭앤멘토링연구소 대표는 “국제중을 준비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이 학원, 저 학원을 오가는 모습이 대치동의 상징처럼 보이던 시기”라고 말했다.

같은 시기 대입 학원도 달아올랐다. 이채연 명인학원 대표는 “수능만 잘 보면 내신에 상관없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던 입시 정책이 대치동 학원가를 무한대로 키웠다”고 말했다. “입시의 마지막 관문이 수능이라는 하나의 시험으로 귀결되니,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너나없이 수능 과목별 스타강사를 찾아 대치동으로 밀려들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수학 한석원, 국어 이효상, 사탐 손주은, 과탐 이범’이 유행어처럼 회자됐고, 이들의 강의에는 전국에서 온 고등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방학이면 지방 학생들이 대치동 일대 오피스텔과 고시원에 거주하며 ‘1타 강사(최고 인기 강사)’의 특강을 수강했다.

김 원장은 “특목고 학원에서 모아 놓은 다수의 상위권 중학생들이 대치동의 대입 학원으로 고스란히 유입되는 효과도 컸다”며 “교육열이 강한 데다 경제력까지 갖춘 대치동 학부모들은 ‘몸값’ 높은 1타 강사의 강의료도 기꺼이 내는 분위기였고, 최상급 강사들 역시 대치동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국제중-특목고-대학 입시까지 아우르는 대치동 학원가는 연일 불야성을 이루며 신화를 써내려갔다.

사교육 억제로 학원 문 닫는데, 학부모 부담 그대로
전문가들 “취약한 공교육, 대치동 아성 못 무너뜨려”
먼저 학교 교육 수준부터 올려야 사교육 1번지 해체

사교육 억제 정책 … 2008년 내신으로 특목고 선발

하지만 대치동 학원가의 가파른 성장 곡선은 2008~2011년 사이 급격히 완만해졌다. 2008년 특목고 선발 방식이 학교별 지필고사에서 중학교 영어 내신으로 바뀐 게 변곡점을 찍었다. 2010년대에 들어 ‘쉬운 수능’ 기조가 유지되고 정부의 입시 다변화 정책으로 대입 수시 전형이 늘어났다. 수능의 영향력이 이전만 못 하자 대치동의 열기는 사그라졌다. 유아·초등생까지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았던 국제중 입시도 2014년 추첨제로 바뀌었다.

이종서 이투스청솔 평가연구소장은 “수능이 쉬워지니 굳이 대치동 1타 강사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어졌고, EBS 연계율이 70%까지 높아지면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독학하는 ‘나 홀로 수험생’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특목고의 학교별 지필고사가 사라지면서 외고 입시학원은 직격탄을 맞았다”며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2010년부터 시행된 밤 10시 이후 학원 수업 금지 조치도 대치동 학원가에 타격을 입혔다. 김영규 영재학원 원장은 “‘학원 교습 시간 제한 조치’는 대치동 학원가의 마지막 숨통을 조였다”고 표현했다. 강사 1명이 오후 4시, 7시, 10시, 12시 등 하루 4회씩 강의하던 이전과 달리 하루 1~2회밖에는 강의를 할 수 없게 되면서 학원의 수익성이 악화했다. 김 원장은 “학교 방과후수업 시행으로 학생들의 하교 시간이 늦어진 데다 학원 교습은 밤 10시로 제한하니, 학원 시간표를 짤 수가 없는 형편이 됐다”며 “학생들이 학원에 머무르는 시간 자체가 짧아져 수업 수와 강사 수를 줄여야 했고, 결국 학원 규모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일자리 잃은 대형 학원 강사들, 작은 학원으로 이동

대형 학원의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최근에는 매물로 나온 학원이 부쩍 늘었다. 대치동 공인중개사 신모씨는 “겉으로는 멀쩡하게 수업을 계속 하는 것 같지만, 암암리에 헐값으로 내놓은 학원이 부지기수인데 그나마 사겠다는 사람도 딱히 없다”고 얘기했다. 김갑수 강남구보습학원연합회 회장은 “수치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학원이 사라지고 있다”며 “대치동 학원가가 불황이라는 건 맞는 얘기”라고 전했다. 김 회장은 “과거 100평 이상 대형학원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규모를 줄이고, 이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강사들이 인근에 작은 학원을 차리는 상황”이라며 “큰 학원이 쪼개지고, 또 쪼개지는 형국이라 숫자만 보면 학원 개수가 유지되는 것 같지만 개별 학원의 경영 상태는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이모 원장은 “공인중개사에서 학원 인수하라는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온다”며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350만원인데, 학생은 50명이고 강사는 2명이다. 다 넘겨줄 테니 보증금 5000만원만 챙겨달라’는 식의 전화를 받는데 (대치동 상황이 좋았던) 5년 전만 해도 상상 못 할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2008년 이후 계속된 입시 정책의 변화가 ‘국제중-특목고-대입 수능’이라는 전통적인 사교육 시장을 세분화하는 데 성공했다”며 “대입 수능 시장이 줄어든 만큼 수시 시장이 커졌다는 얘기도 있지만, 수능 시장의 축소분을 상쇄할 만큼은 아니기 때문에, 교육 정책으로 사교육을 잡는 부분은 일정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여전히 부실한 공교육,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곳 학원가가 침체했으니 사교육 1번지의 아성도 무너지는 걸까. 교육전문가들은 “대치동 학원가는 또다시 최적화된 시스템을 찾아낼 것”이라며 “이곳에서 소비되는 사교육비 전체 규모는 줄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이 대치동 학원가에 대해 낙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치동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엔 우리나라 공교육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이종서 이투스청솔 평가연구소장은 “사교육이 성장하는 첫째 조건이 바로 공교육의 허술함”이라며 “사교육 1번지 대치동의 생명력은 공교육의 건실함과 반비례한다고 보면 된다”고 얘기했다.

이범 교육평론가 역시 “우리나라 공교육의 비효율과 무책임이 대치동 학원가를 일으켜 세운 토대”라고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공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보면 졸업식 바로 전날까지 수업이 이뤄진다는 전제로 짜여 있다”며 “실제로 3학년 11월에 수능을 치러야 하니, 아무리 늦어도 3학년 1학기까지 전 진도를 마감하고 입시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또 “가장 이상적인 교육과정은 2학년 때까지 전 과정을 마치고, 3학년 때는 수시와 정시 등 입시 체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교육과정이 비현실적이니 학생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뿐이란 얘기다.

대치동 사교육이 점점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공포 마케팅을 통해 이뤄진다는 비판에 대한 반박논리도 공교육에서 찾았다. 유·초등생 대상 독서토론학원인 P학원의 최모 강사는 “이곳을 찾는 학부모들은 학교 교육은 아예 믿지 않는다”며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 봐야 한글 읽기와 쓰기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학부모들은 당연히 사교육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초등학교 1학년에 ‘읽기’ 과정은 단 4주 편성돼 있다.

영어 교육에 대한 불만도 크다. 초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 조은정(서울 강남구·40)씨는 “학교 영어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일주일에 2시간, 5학년부터는 3시간씩 가르치는 게 전부”라며 “이 정도 수업으로 외국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씨는 “영어 사교육을 잡겠다고 수능 영어를 절대평가로 자격고사화를 한다는데, 영어는 수능이 목표가 아니라 미래 사회를 살아갈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 아니냐”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부족하니 좋은 학원에 보내려는 건 당연한 결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학부모 김소연(서울 서초구·38)씨는 “학교 교사에게 아이의 학업에 대해 상담하다 보면 ‘학원에 보내라’는 조언을 종종 듣는다”며 “공교육 교사마저 학교 교육을 통해 아이의 학업 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치동 학원가는 공교육이 채워주지 못한 갈증을 해소해줬기에 주목을 받았던 것”이라며 “입시 정책의 초점을 ‘사교육 억제’에 맞추기보다 공교육 수준 향상에 주력한다면 대치동 학원가는 자연스레 해체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박형수·전민희·정현진 기자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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