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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태완씨 재조사/「12·12」 고소사건

    12·12사태 고소·고발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공안1부는 18일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을 17일에 이어 재소환,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16일 소환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과 장

    중앙일보

    1993.08.18 00:00

  • 「12·12」 관련자 수사 착수/서울지검

    ◎전·노 전 대통령등 34명/정승화씨등 고소따라 대검은 20일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12·12당시 군지휘권을 박탈당했던 육군수뇌부 22명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

    중앙일보

    1993.07.20 00:00

  • 저녁모임에서「정 총장 납치」들어|왼팔에 총상 입고 보안사 끌려가

    79년 12월12일, 단위부대장 회의를 주재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보안사 참모장의 전화연락을 받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저녁을 함께 했으면 한다고 했다. 해도 바뀌고 서로가

    중앙일보

    1989.03.06 00:00

  • 언론에 밀린 수사…배후 등 의혹 남아|오 부장 테러 사건 수사 전말-기자 방담

    -오홍근 중앙 경제 사회 부장 피습 사건은 발생 19일 만인 25일 범인 4명이 군 수사 당국에 검거됐으나 범인이 현역 군인이라는 충격과 함께 배후·은폐 기도에 대한 의혹으로 국민

    중앙일보

    1988.08.27 00:00

  • 오 부장 테러범 잡히자 경찰이 "생색"

    군당국이 오 부장 사건 재수사에 나서게 된 것은 결정적인 제보 외에도 국방부 및 육본의 소장장성들이 예하부대의 보고에 의심 가는 부분이 많다고 군자체수사를 진언했다는 얘기다. 이

    중앙일보

    1988.08.26 00:00

  • 정병주·김진기씨 1문1답 요지

    8년만에 처음 입을 연「12·12 사태」의 또 한 당사자인 정병주전특전사령관·김진기전헌병감은 노태우·유학성 두사람의 설명과 주장이 사실과 달라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아는 정확한 진상

    중앙일보

    1987.11.24 00:00

  • (34)무력대치 9시간-모든 상황 끝난 뒤 대통령 재가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육군본부 수뇌부에 의해 내려진 비상 「진도개 하나」는 합동수사본부 측에 대한 반격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상대는 아니었다. 사태는 무력대

    중앙일보

    1987.11.17 00:00

  • (23)D데이는 장군진급 심사 끝난 12일

    그날 밤의 사태 이전에도 심상치 않은 어떤 흐름은 있었다. 박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권력의 공백 때문에 계엄령이 발동되어 있기는 했어도 비교적 평온했다. 계엄 업무는 계엄사령관의

    중앙일보

    1987.11.16 00:00

  • (22) "「슈퍼살롱」을 찾아라" 긴급명령

    12월12일 하오 5시40분쯤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는 당초 6시에 대통령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

    중앙일보

    1987.11.14 00:00

  • (6)카터, 한미 정상회담 불만 「밴스」에 호통

    한시대가 막내리던 마지막 순간들을 지켜봐야 했던 김계원대통령비서실장-. 그는 비극의 배경이된 권력의 내면을 나지막이 설명해 나갔지만 궁정동 현장의 회상에선 상념에 젖어 말이 끊어지

    중앙일보

    1987.09.18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91》 | (144) 장창국 | 6군단 포병부대

    해병대가 재1한강교를 폭파하기전인 16일 상오3시30분 6군단 포병부대는 이미 당초의 개획대로 육군본부 광장에 집합해 있었다. 즉 혁명군 가운데 최초로 서울에 진주한 부대가 된것이

    중앙일보

    1983.04.20 00:00

  • (3687)제79화 육사졸업생들(140)-6관구 사령부의 혼란

    30사단의 기밀누설로 출동 예정부대가 좌초위기에 놓인데다 6관구사령부와 33사단마저 혼미에 빠져들어 간다는 김재춘 6관구참모장(5기)의 다급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소장은 예정보다 3

    중앙일보

    1983.04.15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4)16인 하극상사건

    송요찬 참모총장이 정군을 주도하다 구속된「8·8그룹」 (8기생 주동자8명)을 전원 석방함으로써 육본안에 술렁거리던 분위기는 일단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군 고위층에서는 육본의 8

    중앙일보

    1983.04.08 00:00

  • 제79화 육사졸업생들(115)-「7후」의 활동

    6·25때 한강인도교를 너무 일찍끊어 피해가 막대했고 말썽도 컸지만 큰다리를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군사적으로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당시로는 기술적으로도 결코 쉬운

    중앙일보

    1983.03.16 00:00

  • 「사실」에 충실했지만 덧붙일 점도…

    5·16 주역 5명이 자리를 같이해 중앙일보의 연재물「제삼공화국」에 대한 도움말을 주었다. 「5·16 민족상」이사를 맡고 있는 이들은 지난 22일 국일대반점(5·16 민간협력자 김

    중앙일보

    1982.02.26 00:00

  • 가장 길었던 사흘(14)

    5·16출동부대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군단장 김웅수 소장과 그 예하 사단장 정강 준장이었다. 서울의 비상사태에도 대비하는 이 사단은 군단장의 출동명령을 촉구하고 있었다. 육본의 군

    중앙일보

    1982.02.15 00:00

  • 제3공화국

    육본의 혁명군 지휘부에도 16일은 긴장의 하루였다. 서울장악에 성공하면 전군혁명으로 가리라던 예상이 빗나가 대책은 뒤죽박죽이었다. 상오10시 서울시경에서 열린 출동부대 지휘관회의는

    중앙일보

    1982.02.12 00:00

  • (19)가장 길었던 사흘(8)

    장도영 참모총장이 다시 방첩대로 돌아온 것은 5월16일 0시가 지나서였다. 출동을 중지하라는 총장의 지시는 집행되지 않은 채였다. 부대의 웅성거림은 계속되고 있었고 수습 특명을 받

    중앙일보

    1982.02.08 00:00

  • (15)가장 길었던 사흘(4)

    한강의 총격전은 0시의 출동부대를 불안하게 했다. 장도영 참모총장의 진압명령이 건성이 아닌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한강의 제2 저지선이 손쉽게 뚫리고 마지막 제3 저지선만

    중앙일보

    1982.02.03 00:00

  • 해병과 함께 도강

    박소장이 사령부에 도착한지 얼마안돼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이 70여명의 수사요원을 대동하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대령이 동조자로 바뀌어 위기를 넘긴다. 이광선씨의 회고. 『15일 밤

    중앙일보

    1982.02.02 00:00

  • "육본비상 불필요"

    『알았소, 먼저 가 있으시오. 나도 곧장 그곳으로 가겠소.】그러곤 술자리로 다시 들어갔다. 장 총장이 서올 소공동의 방첩대에 도착한 것은 10시30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는 대기

    중앙일보

    1982.02.01 00:00

  • 제3공화국(13)

    0시의 주력부대는 혼란 속에 있었다. 위기는 출동 1시간전인 23시 지휘부로 예정된 ×관구사령부에서 나타났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긴급지시를 받은 이광선 헌병차감이 수사요원(CI

    중앙일보

    1982.02.01 00:00

  • 총장 소재지 몰라

    이렇게 해서 사령부는 혁명군 쪽에서 부대수습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사령관의 비상소집으로 귀가했던 장교들이 부대로 들어와 뒤섞였다. 누가 혁명군인지 누가 진압군이 될지 분간할 수

    중앙일보

    1982.02.01 00:00

  • (8)-혁명전야⑦

    61년의 정치는「3월 위기설」과「4월 위기설」에 부대꼈다. 윤보선 대통령은 그해 3월 정례기자회견에서 위기설에 대해『지금은 난국이기는 하지만「위기」는 아니다』라고 했다. 장면 총리

    중앙일보

    1982.01.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