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2) "「슈퍼살롱」을 찾아라" 긴급명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2월12일 하오 5시40분쯤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는 당초 6시에 대통령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안사령관이 말씀드릴게 있답니다』는 최광수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은 최대통령이 『목욕을 하고 쉬려하니 꼭 보고할게 있으면 일찍 오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해서 2O분이 당겨졌다. 최대통령은 내각개편관계로 지쳐있었고 이날은 휴식을 위해 평소보다 일찍 공관에 돌아와 있었다.
합수 본부장은 최대통령에게 정 계엄사령관과 김재규의 관련, 진술상의 차이 및 이에 따른 국민적 의구심을 덜기 위해 정 계엄사령관의 연행조사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구했다.
최대통령은 당혹한 듯 했다.
국방장관을 경유해 재가를 요청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합수본부장은 박대통령 때 예를 들어 시급하고 비밀을 요하는 경우는 대통령께 직보해 결심을 구했었다는 설명을 하며 최대통령의 결심을 촉구했다. 윤필용 사건 때도 그러한 전례가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최대통령은 자신은 박대통령과 달리 군에 관해 갈 모르고있다는 점을 들어 국방장관의 보좌가 필요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1시간30분 여의 「승강이」 가 계속됐지만 최대통령은 여전히 재가를 미루었다.
이미 연행을 위한 행동이 시작됐을 것이라는 점을 얘기해도 마찬가지였다.
합수본부장이 최대통령을 설득하고 있을 무렵인 하오6시, 수경사○경비단에는 이미 몇몇 군장성들이 거의 도착해 있었다.
막 도착한 제○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은 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의 방으로 향하는 제○군단강 황영시 중장과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황장군은 노장군이 연락해 이 자리에 참석하도록 미리 수배되어 있었다.
단장실에는 ○○군단장 차규헌 중장, 황영시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을 비롯해 9사단장 노태우 소장, 백운택 준장, 특전사 ○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등이 예정시각에 모두 모여 최대통령을 만나러간 합수본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합수본부장이 최대통령의 재가를 얻는데 1차 실패했음에도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 연행하는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멈출 수 있는 일이 못 되었다.
하오7시, 사복차림의 허삼수·우경윤 대령이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공관에 수사요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육군본부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모대령, 수경사○단 헌병단장 최모중령, 육군 본부헌병대장 이모중령이 이끄는 1개소대의 헌범범력도 공관주변에 배치했다.
이때 정총장 부부는 외출 준비중이었다. 정총장은 부인 신유경 여사의 동생(육사15기)이 이날 발표 된 장군승진 대상자였기 때문에 반가운 소식을 장모에게 알릴 겸해서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 때 부관인 이재천 소령이 보안사 정보처장(실제는 인사처장)이 보고하러 왔다고 전했다.
공관 1층 대기실에 간 정총장은 낯익은 禹대렁과 다른 사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났다.
정총장은 이번에 승진을 못시켜 미안하다면서 내년에는 틀림없이 해줄 것이라고 했지만 우대령은 평소와는 달리 다소 퉁명스러웠다. 보안사 처장이라는 허대령의 자기 소개를 받은 정총장은 용건을 물었다.
허대령이 말했다. 『총장님, 김재규에게서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그게 용건인가. 그것은 이미 말하지 않았나. 김재규 정보부장이 중추절에 3백만 원을 보내왔었다고.』『그런데 김재규는 7백만 원을 건넸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번 더 참고로 진술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게 꼭 필요해. 전에도 해 주지 않았나.』
『그 때는 그런 얘기가 없었습니다.』『그럼 여기서 하면 안돼.』
『총장님,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저희들이 준비해 오지도 않았고. 총장님 위신에 관한 문제니 관계되는 증언을 녹음으로 해 주셔야겠습니다. 녹음해 두면 공판정에 직접 나가지 않으셔도 되지 않습니까.』『녹음을 해야겠다면 집에도 녹음기가 있으니까 그걸 쓰면 되겠네.』 그러나 두 수사관은 『저희들이 준비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리로 잠시 가시지요』라고 했다. 순간 정총장의 안색이 변했다.
『도대체 너희들이 어디서 왔나.』정총장의 음성이 높아졌다.
정총장은 두 수사관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그리고는 대통령의 허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각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두 수사관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나왔다.
『이놈들아, 내가 계엄사령관이야. 계엄사령관인 내가 어떻게 너희들이 가자는 대로 가겠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재가를 받았다고….』역시 받았다는 대답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각하께서 전화라도 하셨을 텐데…아니면 장관을 통해서라도 얘기가 있었을 것 아닌가.』그러더니 정총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수사관도 덩달아 일어섰다. 이때 정총장은 뭔가 오해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김재규가 자신을 물고 들어갔고 최대통령이 오해를 하게 된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어이, 부관 어디 있어.』
수석부관이 응접실 왼쪽에 있는 방에서 뛰어나왔다.
『총리공관에 전화를 걸어 나 바꿔 줘.』
그러고는 대통령과 연결이 안되면 국방장관과 전화연결을 하라고 했다.
부관 이소령이 현관 왼쪽의 부관실로 들어간 직후 사태를 눈치챈 공관 경비헌병들이 들이닥쳤다.
그 순간 허· 우 두 대령은 정총장을 양쪽에서 팔짱을 끼우며 끌고 나가려했다.
경비헌병 2명은 정총장의 오른팔을 끼고 있는 우대령을 떼어냈고 헌병에 의해 낚아 채이는 순간 척추 부근에 총상을 입었다.
허대령은 달려든 헌병 2명을 뿌리치면서 권총을 정총장 옆 이마에 들이댔다. 밖에서도 총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관 이소령과 다른 부관 김모 대위도 관통상을 입었다.
정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헌병들이 물러나자 허대령은 정총장을 바짝 끼고 대기중인 일제 슈퍼살롱 승용차에 올랐다.
M-16과 권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이 띄었지만 달려들지는 않았다.
정총장을 태운 세단이 정문을 빠져나갔지만 수사요원 2명이 양쪽에서 정총장을 감싸고 있는 상황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세단은 시내 모처의 보안사 조사실로 줄달음쳤다.
수 시간 후 12·12사태와 관련, 경찰이 긴급지시 1호로 내린 명령이 바로 이 슈퍼살롱을 찾으라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끝날 때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정총장은 8년여가 지난 오늘에도 그 날 조사실의 얘기를 떠올리면 분노에 몸을 떨고있다. 그는 특히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자신이 받은 상대의 처우에 분을 토하고있다.
어쨌든 정총장의 체포· 연행에 성공한 허대령은 도착직후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정총장을 연행하는데는 일단 성공했지만 총격전이 벌어지고 따라서 정총장 지지부대의 호응이 예상됐기 때문에 상황은 더 급박하기만 했다.
최대통령의 체포 동의를 아직 받지 못한데다 정총장을 「조용히」 ○경비단까지 데려오는데 실패했으니 벌집만 건드린 격으로 일은 뒤틀리고 있었다.
그래도 정총장을 연행했으니 최대통령의 동의를 받는다면 승산은 있었다. 최대통령과 다시 부딪쳐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지휘부의 장성 모두가 나서기로 했다.
하오 8시쯤 합수본부장을 선두로 차·유·황 3중장 등 7명이 다시 총리공관으로 최대통령을 찾아갔다. 최대통령은 여전히 「국방장관」을 통해 건의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절차를 강조했다.
이 때 최대통령을 만나러 와있던 신현확 총리도 최대통령과 같은 의견이었다.
정총장이 허대령 등에게 연행된 직후 부인 申여사는 외부와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모든 전화선이 절단 돼 불통이었고 비상전화 하나만이 살아있었다.
신여사는 먼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대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유장군은 즉시 조치를 취하겠노라고 했다. 신여사는 이어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에게 연락을 했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는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육군 참모차장에서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옮겨 있던 이와성 장군은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신여사가 안면 있는 군 고위 장성들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허대령 등이 왔을 때 코피를 날라준 당번병(일등병) 은 육본상황실로 정총장 피랍사실을 알렸다. 하오 7시40분쯤이었다.
급보에 접한 육본상황장교는 잠시 연락을 취한 다음 하오8시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사태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합수본부 측에도 낭패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 합수본부측은 유사시 가장 위협이 될지 모를 수경사와 특전사의 장태완·정병주 두 사령관에 대한 대책이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날은 장군승진심사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승진대상자뿐 아니라 군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술렁거렸다.
그리고 바로 이날은 승진대상자 명단이 밝혀져 각종 회식이 잇달았다.
수경사 헌병단장 조모대령은 상관인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모시고 진급 감사 회식을 하고 있었다. 사전에 부대로부터 떼어놓자는 얘기가 있어 벌인 회식이었다.
막 취흥이 도도해질 판에 수경사령관 부관이 주연을 「방해」했다.
무전연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부관은 『사령관님, 비상입니다.』
『뭐야?』
『총장님께서 납치됐답니다냄
놀라움으로 일그러진 두 사령관은 그 순간 거의 일제히 외쳤다.『××× 짓이구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