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실」에 충실했지만 덧붙일 점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5·16 주역 5명이 자리를 같이해 중앙일보의 연재물「제삼공화국」에 대한 도움말을 주었다. 「5·16 민족상」이사를 맡고 있는 이들은 지난 22일 국일대반점(5·16 민간협력자 김덕승씨 경영)에서 오찬을 함께 하며 2시간30여분동안 그 동안의 게재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비평했다. 참석자는 5·16 당시 박정희 소장의 오랜 친구로 그를 도왔던 이주일 소장(최고회의 부의장·감사원장·현 민족상 총재), 김동하 예비역소장(최고회의 고문 재경위원장)을 비롯, 거사 지휘본부였던 ×관구 참모장으로서 출동부대를 지휘한 김재춘 대령(최고위원·CIC대장·CIA부장), 후방 책임을 맡은 박기석 대령(최고위원·건설부장관·현 민족상이사장) 및 ○사단부연대장 고동철 중령(서울시경 국장·현 민족상사무총장) 등. 이날 참석자들은 대담 내용을 조언에 불과한 것이라며 게재 않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질책으로서 음미할 내용이 많아 여기에 소개키로 했다. 모두의 넓은 이해를 구한다. 이주일·김재춘 장군은 농장을, 김동하 장군은 장남의 사업을 돌봐주면서 대개는 독서나 서예로 지내고 있다. 이 장군 등은 초지가 분열로 헝클어지고 박 의장이 애초의 뜻을 넘어선 데 대한 회한을 간직하고 있다.
이=지금 중앙일보를 필두로 네 개의 일간지가 제삼공화국의 일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직 역사를 기술하기에는 때 이른 감이 없지 앓고…당시의 관계자들이 거의 생존 있고….
김동=많은 증언으로 사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중앙이긴 하지만 그래도 얼마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증언자가 진실에 어디까지 충실했는가 하는 것도 문제고…. 개중에는 증언을 기피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김재=기억을 더듬어 하는 말이니까 때로는 오류가 없지 않겠지요. 그날의 일들을 기록하는 것을 꺼리는 풍토가 지배적이 아닙니까. 기록이 어느 경우에는 자신에게 때아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제3자까지 봉변을 당하게 하니, 하기야 사관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성·공정성을 유지해야 할 공식기록들이 편찬당시의 소위 실력자들에 의해 왜곡되니 후일 당시의 일들을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겠죠. 개인 기록은 미흡하고….
박=특정인에게 유리하고 다른 사람은 공식기록에서 그 행적을 제외해버렸기 때문에 이를 수집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겠죠. 이미 고정관념화 한 내용을 완전 탈피하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공을 과장해 수록했으면서도 그걸 바로잡는데 대해 당사자나 그 유족들은 <권좌에서 물러나니 본인을 의도적으로 헐뜯고 있다>라고 분개할지도 모르고요.

<주역 아닌 사람 부각>
고=진실된 부분은 그렇다 치고 아직도 사실 규명이 안됐다는 점들은 무엇일까요.
김재=제일 큰 것은 5·16의 원인·동기 등에 관한 것 같습니다. 5·16을 마치 「16인 사건」 즉 하극상 사건이라는 데서 연원한 것으로 한 점입니다. 물론 빙산의 일각은 될지 모르죠. 그러나 이를 5·16의 본류로 봐서는 안되죠. 그렇게 되면 일부 장교들의 불만이 5·16을 일으킨 원인으로 됩니다.
거사 후 「5·16 군사혁명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밀쳐낸 사람의 공을 크게 부각시킬 수는 없고 하니 별것도 아닌 일을 「혁명의 싹」이었다고 규정한 것이 이런 결과로 나온 듯 합니다.
박=맞습니다.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지엽적인 것을 일을 성사시킨 요인으로 파악한 것은 우리의 순수했던 뜻을 그르칠 우려가 있읍니다.
김동=사소한 것 같지만 5·16의 상징처럼 돼있는 박정희 소장 등의 사진을 예로 들어봅시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박종규 소령·차지철 대위가 있는 사진 말입니다. 사실 두 사람은 경호병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5·16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이 사진은 5월18일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가두시위가 있을 당시 서울 시청 앞에서 장도영 참모총장이 지프 위에 올라가 이들을 격려할 때입니다.
장 총장은 그때까지는 혁명의 표면상의 지도자로서 지프 위에서 연설하고 있고 박소장은 그 옆에 서있는 장면입니다. 뒷날 장 총장이 실패했으니까 그 부분을 없앤 건 이해가 되죠. 또 박 소장은 거사를 주도했으니까 당연하지만….
김재=한창 주체라고 떠드는 Y씨(당시 대령)는 주체가 아닙니다. 야전군의 ×군단, ○군단 등과 미군이 진압군 투입 설로 육본이 어수선할 때 일입니다. 박 소장은 윤보선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부대를 재배치시키고 청와대로 향하려는 참이었읍니다. 박 소장과 육본 정문을 나서려는데 Y씨가 와서는 청와대에 간다니까 자기가 윤 대통령을 잘 안다는 겁니다.
박=그때 처음 나타난 거죠. 박 소장이 <그래 잘됐어, 타지>한 것이 주체라고 나서게 된 것 아닙니까.
김재=청와대에 도착하자 김남 비서관이 나왔는데 <각하를 모시고 할 것>이라는 우리 계획을 재차 확인하고 들어갔습니다. 윤 대통령은 회색이 만면하더군요. 옆 비서실로 가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에게 <현석호 국방장관을 내보내 청와대에까지 오게 하면 어떡하느냐>고 했더니 <네가 단장이면 어떠하겠나? 지도자도 모신 총장이 데려간다는데 어떡해>하고 답변했읍니다.
담판을 마치고 나온 박 소장은 <현 장관이 나타나 국방장관인 내가 모르는 계엄령이 어디 있냐고 추궁하는 바람에 혼났다>며 화를 내길래 자초지종을 설명했죠. <누가 허가 맡고 혁명합니까 라고 대꾸해주지 그랬읍니까>라고 했죠. 박 소장은 현 장관의 출현에 화를 내면서도 윤 대통령의 지지 결의를 확인했다며 자신을 찾았읍니다.

<장 중장 총장 추천>
김동=윤 대통령건은 잘 생각해볼 문젭니다. 대통령으로서 여러 가지 상황을 검토해야 할게 아닙니까. 윤 대통령이 성공의 모멘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재=거사가 하루 이틀에 된 게 아닌 근거를 열거해 봅시다. 박 소장이 신임하는 이주일 장군을 ×관구 사령관에 전출시키기 위한 공작은 실패했읍니다만 장도영 중장의 참모총장 전임은 성공했지 않았습니까. 박 소장의 지시를 받고 민주당실력자 오위영씨를 만났습니다. 오씨의 사무실인 메트로호텔로 찾아가 장 중장을 천거했더니 <한번 데려 오라>고 합디다. 장 중장이 큰절하고 무릎 꿇고 앉으니 <해봅시다>고 하더군요. <현 국방에게는 자신이 얘기할 테니 당신(김재춘)은 박순천 여사에게 지원을 요청하라>고 했읍니다.
최경록 장군의 총장 유임을 정일형씨가 밀고 있으니 신경을 쓰랍디다. 장 중장이 참모총장이 된 뒤 나, 송찬호, 최택원 장군 등이 거사 개요를 브리핑하곤 했읍니다.
김동=박정희 소장은 늘 나라 걱정을 했습니다. 이종찬 장군과도 얘기를 많이 했죠. 내가 예편될 때는 장 중장·박 소장·이주일 소장 등이 만나 한참 앞일을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장 중장과 나는 따로 2시간을 얘기했습니다. 박 소장은 누구를 지도자로 모시느냐하는 문제로 고심했고…. 이런 것이 쌓여 혁명으로 되는 것 아닙니까.
박=당연한 말씀입니다. 역사를 자기중심으로 기록한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김재=4·19때 지방에 있던 박정희 소장은 서울 사태에 관심이 많아 내게 자주 전화를 하고 걱정을 합디다. 혁명해야겠다는 결심은 그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동=박 소장은 군수기지 사령관으로서 계엄업무를 수행해야하니 나에게도 서울의 동정을 살펴달라고 부탁합디다. 내가 서울을 다녀온 얘기를 했더니 고민을 해요. 송요찬 총장과 박 소장간의 얘기를 해보죠. 송 총장의 요구로 해병대 사령관이 해병상륙 사단장인 나에게 해병대를 ××로 출동시키라는 연락을 해왔읍니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출동합니까. 거기에는 군수기지 사령부도 있지 않읍니까>고 대꾸했더니 막무가내입니다. 그래 <상대는 누구죠. 발포명령은 누가 합니까>했더니 <사단장이 알아서하라>는 거예요. 당시 강기천 참모총장(후일 해병대사령관) 정광모 연대장(후일 해병대 사령관) 등을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정 대령을 선발대로 보냈습니다. 별것 아니라는 상황보고를 받고 내가 군수사로 가 박 소장을 만났더니 <우리가 있는데 해병대가 왜왔어>하고 화를 냅디다. 경위를 소상히 설명했죠. <누구한테 총질하란 말이냐>며 둘이서 함께 분개했죠. 군수기지 사령부의 미 부수석 고문도 들어와 상황은 Nothing이라고 합디다.

<해병도 거사계획>
김재=송 총장 물러가라는 메시지가 박 소장이 쿠데타 한다는 소문을 낳게 했습니다. 조사차 나온 최 장군은 헌병 장교로 있던 이강대·박영수씨(현 서울시장)로부터 현지 상황을 보고 받았는데 이씨는 박 소장에게 불리하게, 박씨는 유리한 증언을 각각 했습니다. 결국 최 장군은 소문과는 다르다는 보고를 하게됐고 5·16 후 최 장군은 요직을 맡을 수 있게 된 거죠.
김동=박 소장은 4·19때 ××지구 계엄사령관인데도 학생데모에 합류해 만세를 함께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그때 문제가 됐는데 박 소장은 최영희 장군에게 <내가 학생 데모 속에 뛰어드는 것이 사태수습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들어가서 만세를 부른 아니고 설득을 했다>라고 해명했답디다.
어쨌든 나는 박 소장을 만나고 온 뒤 <이거 안되겠다>싶어 해병대 단독 거사계획을 세웠습니다. 내 심복들에게 거사 준비를 극비로 지시했어요.
철도로 병력을 수송할 경우와 함정으로 인천에 당도하는 방안 등을 세밀히 검토했읍니다. 이때 얘기됐던 함대사령관 이맹기 제독은 5·16 당일에는 백령도에 출장중이라 합류를 못했죠. 김윤근 준장의 제×해병 여단장 전임은 그후 박 소장과 내가 공작한 것입니다.
박=박 소장은 61년 4·19 1주년 기념식 연설에서도 <군이 어떻게 동포에게 총을 들이대느냐>는 말을 했읍니다. 늘 불러서는 나라 걱정을 했고 우리를 격려했죠. 그런 것을 묻어버리고 불만이 혁명의 근원이 된 것처럼 얘기 된 것은 정말 불만입니다.
김동=5·16이 없었더라도 당시 상황으로는 누구든지 하게돼 있었죠. 내가 국방부 정무차관을 했던 박병배씨를 그가 도미하기 전 만났을 때 일입니다. <민주당이 이렇게 시시하면 곤란하다>며 은근히 의중을 떠 봤더니 <요즘 군인 중 ×단놈 있어. 하기야 민주당도 잘해야 하는데…>하고 걱정을 합디다. 무슨 낌새를 알고 있더군요. 그후 일본에서 전화를 하고는 <나는 어떡하지. 지도자라는 박 소장이 나를 안 좋아하는데>하고 망설입디다. 그러면서도 들어왔지만….
고=박씨는 전에 박 소장이 사령관이던 ×군 국정 감사를 할 때 한바탕 뒤엎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김동=장 총장이 거사를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입장이 곤란했다는 건 이해해줘야 합니다. 그간 박 소장 등 우리와의 관계도 있고 장면 정권과의 사이도 있으니 미묘할 수 밖에요. 한가지 확실히 할 것은 혁명공약은 처음 얘기한 바 그대롭니다. 특히 논란이 많은 6항은 사심 없이 삽입된 것입니다.
일을 직접 하다보니 상황이 달라졌고 어쩔 수 없이 정치에 빠져든 것입니다.
김재=박 소장이 공약을 이행하려고 했음은 사실입니다. 박 소장은 증권파동·새나라 자동차사건·워커힐사건·빠찐꼬 사건 등 4대 의혹사건과 공화성 사전조직을 몰랐읍니다. 최고지도자가 아랫사람의 행동을 일체 몰랐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직접 조사를 담당했던 나는 이를 단언할 수 있읍니다. 일부에서는 공화당 사전조직자체가 원대복귀는 공염불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실제는 민정 참여를 애초 꿈꿨다고 하지만…. 저질러 놓고 앉혔다고나 할까요.
김동=맞아요. 박 의장은 뒤늦게 이를 알고 펄쩍 뛰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것 아닙니까.
김재=4대 의혹사건 등이 세상에 알려지자 박 의장은 민정 불 참여를 결정하고 2·18 성명을 내지 않았습니까. 2·18 선서라는 것도 이런 와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자 일을 저질러 논 당사자들은 당황했죠. 군이 원대복귀하고 사건의 진상이 모두 드러나면 자신들의 앞날의 모습은 확연한 것이고.
그러니 일제히 충동질을 한 것이죠. 주위에서 계속 쏴대는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일을 정리해야 할 수 밖에요. 이래서 63년 3월15일 밤 미대사관을 방문했던 박 의장은 「버거」대사에게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게됐고…. 박 의장은 일이 뒤죽박죽 되자 <넌덜머리가 난다. 어디로 가서 조용히 있고 싶지만 이 꼴로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고 하니 근처에 농장을 준비해 달라>고 호소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김종필씨가 이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이유에 나서게 되자 그와 함께 일을 했던 J씨는 <너 혼자만 살려고 나가느냐>며 권총을 들이댄 일이 있었읍니다.
김동=나는 박 의장과 옛날의 맹약도 있어 공약대로 할 것을 믿었읍니다. 그럼에도 4대 의혹사건 같은 것이 나고 하니 정말 미칠 지경입디다. 그래서 옷을 벗기 전 박 의장에게 말했읍니다. <순수한 마음 변치 마시오. 누구의 얘기를 어디까지 듣고 끌고 나갈 참이오>라고….
이=고인이 된 사람을 놓고 얘기해 뭐합니까. 하기야 처음 구상대로 밀고 갔으면….
김재=박 의장은 만들어 놓은 말에 올라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쩝니까. 판 벌여놓고 무작정 떠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박 의장은 그래도 괴로워 <일단 들어가자. 일이 안돼 국민이 부르면 다시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했읍니다.
이=아쉬운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민정 참여로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니 그걸 공으로 돌리고 긴 안목으로 보아 그때 가서 평가받도록 합시다. 어쩌다보니 5·16의 명맥을 잇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설움을 받았군요. 아이러니입니다.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도, 「프랑코」스페인 총통도, 「낫세르」이집트 대통령도 모두가 혁명동지는 끝내 보살폈는데….

<좌담 참석자>
이주일(소장·×군참모장)
김동하(예비역 해병소장)
김재춘(대령·×관구참모장)
박기석(대령·×군공명참모)
고동철(중령·○사단부인대장)
( )안은 거사당시 계급·직책. 고씨는 후일 이름자중의 「철」자를 「철」로 바꿨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