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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차 한·미 안보협의회

    금 26일부터 이틀동안 미국 콜로라도스 프링즈에서는 제5차 한미 안보협의회의가 열리게 됐다. 연례적인 회합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회의 같이 그 귀추가 주목되는 회의는 일찍이 없었다해

    중앙일보

    1972.06.26 00:00

  • 「아스팍」총회의 폐막성명

    「아스팍」 제7차 각료회의는 3일간의 회의를 끝내고 16일 19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폐막했다. 이 폐막성명은 ①「아스팍」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평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지역

    중앙일보

    1972.06.17 00:00

  • 비군사·비정치-지역협력기구-경제협력 증진 문호개방 등 19개항 채택

    「아시아」태평양 이사회(ASPAC) 제7차 각료회의는 16일「아스팍」을 대항기구가 아닌 순수한 지역협력기구로 더욱 발전시키고 문호개방을 선언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폐막했다. 3일

    중앙일보

    1972.06.16 00:00

  • 아스팍 공동성명 요지

    ▲각료들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문제에 관하여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하였다. 각료들은「닉슨」미대통령의 북경 및「모스크바」방문을 포함하여, 평화를 위하여 미국이 취한 최근 일련의

    중앙일보

    1972.06.16 00:00

  • 키신저 방일이 남긴 것|동경 박동순특파원

    키신저 미대통령특별보좌관의 방일과 미·일관계 민간회의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미·일 관계의 총점검 움직임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두가지 이벤트 이외에도 앞으로 6월중에 양국 재

    중앙일보

    1972.06.14 00:00

  • 안보의 초점은 아시아로

    닉슨 미국대통령의 북경. 모스크바 정상회담은 핵 시대에 있어서의 실리외교의 필요에 바탕을 준 다극체제하의 새로운 국제질서형성에 극적인 막을 올렸다. 그러나 4반세기에 걸쳐 굳어온

    중앙일보

    1972.06.01 00:00

  • 미·소 공동성명 전문

    【모스크바=AP·로이터동화】미·소 지도자들이 29일 「모스크바」정상회담을 마치면서 발표한 공동성명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미합중국(이하 미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하

    중앙일보

    1972.05.30 00:00

  • l2개 공동선언(전문)

    【모스크바29일AFP합동】29일 미국과 소련간에 채택된 공동선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미합중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간의 기본원칙을 「유엔」헌장 하에서의 그들의 책무

    중앙일보

    1972.05.30 00:00

  • 미·소 정상회담의 성과

    미·소 정상회담은 미·소 양국이 군사적인 대결을 회피하고, 핵전쟁의 유발을 막을 것을 다짐하는 『평화공존 12개 원칙 공동선언문』 을 발표하고, 29일 정상회담 성과를 요약한 장문

    중앙일보

    1972.05.30 00:00

  • (326)|「아이크」 집권과 내한 (2)|등장의 배경 (2)|6·25 21…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해리·S·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재출마는 단념했지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프레드·빈슨」 대법원장이 후보가 되기를 바랐으나

    중앙일보

    1972.05.15 00:00

  • 한반도에 불안요인 상존

    【워싱턴=김영희 특파원】「월리엄·로저즈」미국무장관은 1971년은 미국 외교정책에서 개혁과 성취의 해였으며, 72년은 정상적인 진보 이상의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7일 의회

    중앙일보

    1972.03.08 00:00

  • 예상대로의 닉슨 양보 본사 특파원들이 본 세계의 반향

    【동경=조동오 특파원】미·중공 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 일본정부의 공식반응은『놀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27일 밤 외무성에서 긴급기자 회견을 가진 후꾸다 외상은『코뮤니케의 내용은

    중앙일보

    1972.02.28 00:00

  • (292)-휴전회담의 개막(6)|한국의 입장(1)

    한국정부와 한국사람들은 중공이 개입하고 이어 「맥아더」원수가 아시아 무대에서 사라지자 전쟁의 전망을 스스로 점칠 수 있었다. 그것은 비관과 좌절감이 교차된 어두운 점괘였다. 한때는

    중앙일보

    1972.02.18 00:00

  • (288)|휴전 회담의 개막-전반부(2)|말리크 시의 배경(2)

    미 행정부 요인이 처음으로 38선 휴전에 동의를 비친 것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리」가 한국 휴전을 종용한 바로 다음 날인 1951년6월2일이었다. 이날 한국 전쟁과는 여러모

    중앙일보

    1972.02.09 00:00

  • 우리에 불리한 미·중공 결정 승복 않겠다|박대통령 연두회견

    박정희 대통령은 1l일 연두회견에서『북괴가 무력적화동일의 야욕을 버릴 것을 확실히 약속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북괴가 무력적화통일을 포기한다

    중앙일보

    1972.01.11 00:00

  • '72년에 이월된 세계의 초점

    지난해 국제정치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전후의 양극구조로부터 다원적인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했다. 미·소의 핵균형을 바탕으로 한 양대국체제는 미·소의 전면전쟁은 억제해왔으나 월남전,

    중앙일보

    1972.01.06 00:00

  • 박대통령 신년사 요지

    민족의 비극인 6·25동난이 종전 아닌 휴전으로 끝을 맺고 우리에게 평화와 통일대신 긴장과 분단을 강요한 이래 그 비극은 더욱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농토를 기름지게 하고

    중앙일보

    1972.01.01 00:00

  • 미·소·중공의 대아 정책|인·파전 종식|워싱턴=김영희 특파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인도의 군사적 승리로 끝난 것은 「닉슨」행정부의 「아시아」 정책, 특히 「닉슨·독트린」 수행에 당분간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이곳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중앙일보

    1971.12.24 00:00

  • 미·중공의 외교적 패배|뱅글라데쉬 기정사실화|소 동남아서 교두보확보

    전면전 14일만의 「다카」함락과 동「파키스탄」군 항대은 미·중공의 외교적 패배와 소련외교의 상대적 승리를 의미한다. 동 파군의 항복으로 동서통일「파키스탄」은 붕괴되고「뱅글라데쉬」(

    중앙일보

    1971.12.17 00:00

  • (4) | 빌리·브란트

    『2차 대전 후 독일 문제는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 요소였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한 「빌리·브란트」의 노력은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 질서에 기본적인 기여를 했다.』 이

    중앙일보

    1971.12.16 00:00

  • (257)「맥아더」원수 해임(6)

    (1) 1951년 3월 중순에 「트루먼」대통령은 한국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중대결정을 내렸다. 물론 이것은 「맥아더」가 주장한 것 같은 「완승」이 아니라 「유엔」동맹국의 의향에 따른

    중앙일보

    1971.11.24 00:00

  • 인·소 견제에 선수|파키스탄·중공 회담의 속셈

    「파키스탄」정치·군사 대표단의 돌연한 중공 방문은 ①인·소 추축에 대한 「파키스탄」·중공 추축의 공고화 ②「인디라·간디」 인도 수상의 구미 순방 외교에 대한 「파키스탄」 외교의 견

    중앙일보

    1971.11.08 00:00

  • (3)동남아에 불어오는 것|노재봉

    「현재의 세계현실에 적응」하는 것을 미국의 역할로 규정한 「로저즈」국무장관의 8월2일의 중국대표권에 관한 발언이 이게 중공의 「유엔」가입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로저즈」가 말하는

    중앙일보

    1971.10.29 00:00

  • 인-「파」국경전쟁 일보 전

    【카라치16일AFP합동】「파키스탄」의 PTI통신은 7일 인도의 포대들이 지난 2일 동안 동「파키스탄」에 있는 23개 촌에 포격을 가해 동「파키스탄」인 34명이 죽고 몇 명이 부상했

    중앙일보

    1971.10.1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