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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휴전 회담의 개막-전반부(2)|말리크 시의 배경(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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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 행정부 요인이 처음으로 38선 휴전에 동의를 비친 것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리」가 한국 휴전을 종용한 바로 다음 날인 1951년6월2일이었다. 이날 한국 전쟁과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딘·애치슨」국무장관은 「트리그브·리」총장 견해에 동조하면서 한국문제는 장기적인 정치문제와 바로 눈앞의 군사문제와는 구별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극히 함축성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자유 통일 민주 한국을 수립하려는 정치적 목표는 불변이지만 한국에 파병한 것은 침략을 저지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목적이 달성되고 재침 위협이 없을 때에는 주한 외국군은 철수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다시 「애치슨」장관은 6월7일에 상원의 「맥아더」청문회에 출석하여 「유엔」군은 38선에 따라 휴전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맥아더」해임 후 미국의 외교 정책을 듣기 위해 6월25일 끝난 8주간의 이 청문회는 저명한 시사평론가 「월터·리프먼」이 전시 중 국가이익에 큰 해를 끼쳤다고 평한바와 같이 미국의 외교상의 중대 기밀이 모두 드러나 공산국가들에는 귀중한 정보를 주게되었다.

<원·수폭은 미국의 독점 물>
이러한 「유엔」과 미 정부 고관의 발언을 통하여 공산 측은 미국이 군사적으로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휴전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미국과 「유엔」은 작은 도둑이 침입했을 때는 이를 내몰고 잡아다 처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큰 도둑이 들어오자, 그냥 집밖으로 내몰고 그 다음은 불문에 붙이려고 한 것이다.
한편 공산 측도 또한 1951년 6월에 와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소련은 북경 정권이 아무리 불을 지르고 싶어해도 더 큰 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꺼렸고 그리고 물론 공산군이 한국에서 참패를 당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전선은 38근방의 서부를 제외하고는 경계선 북방에 있었고, 공산군의 입장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모스크바」가 볼 때 중공군이 한국에서 결정적으로 이길 가망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춘계공세 실패 후 「유엔」군의 북진을 막을 기력조차 없었다. 또한 극동에서의 전쟁이 오래 끌면, 끌수록 서방측을 자극해서 「유럽」의 「나토」(북대서양 동맹 조약기구)강화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동맹국들은 한국에서 확실히 평화를 원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의 비타협적 태도가 계속된다면 서방측은 반사작용으로 단결할 것이 분명해졌다.
공산주의자들은 힘으로 이길 수 없을 때에는 입으로 대결한다. 「모스크바」는 지금이야말로 전쟁터에서 협상 탁자로 옮길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게 틀림없었다.
이 밖에도 「모스크바」가 6월23일 「말리크」제의를 내 놓게된 동기나 이유로서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로는 소련이 무엇보다도 미국의 핵무기 우위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1950년 12월의 중공군 대거 개입 때 「트루먼」대통령은 한국전에서의 원자탄 사용 불사 성명을 냈지만 이것은 「애틀리」영 수상의 만류로 불발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주=본 연재 255회 참조)그러나 소련으로서는 일본 광도와 장기 상공에 퍼졌던 미국의 버섯구름이 항상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우기 미국은 1951년 4월에 태평양 「에니웨톡」제도에서 세계 최초로 일련의 수소핵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은 1945년 7월16일에 「아라몬드」실험장에서 원자탄 실험에 성공, 이를 사용하여 일본을 굴복시킨지 6년만에 다시 원폭보다 몇 갑절 파괴력이 강한 수폭을 또 갖게 된 것이다.
적의 춘계 공세가 한창 기세를 부리던 4월에 미국이 수폭을 보유하게 됐다는 것은 주목할만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원·수폭은 완전히 미국의 독점 물이었다. 소련이 겨우 원폭을 실험한 것은 한국 휴전회담이 개최된 후인 1951년10월3일이었고 수폭은 2년 후인 1953년8월13일에 갖게되었다. 7월16일의 한국 휴전 조인 16일만에 소련이 수폭을 처음으로 실험했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다 부질 없는 이야기지만 미국이 휴전회담 개최 전까지도 독점 물이었던 원·수폭을 군사적 압력수단으로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애석한 일이었다.

<소·중공, 일의 재기 두려워>
「맥아더」도 그의 회고록(The Remi-niscences of Douglas MacAuthur)에서 「트루먼」행정부가 한국에서의 군사적 우위와 막강한 핵무기의 힘을 한국의 정치적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이용치 못하고 좌시했다』고 통렬히 비난하고있다.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치 않더라도 이를 정치적이나 외교적 목적달성에 이용치 못하고 사장시킨 것은 「트루먼」행정부의 불능과 직무태만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소련으로서는 미국의 원폭 독점만도 큰 위협인데 다시 수폭을 갖게되자 한국전을 회담으로 매듭짓기로 결심했다.
또한 국제정치에서 볼 때 한국 휴전 개최와 이해 10월에 미국의 원폭독점이 깨짐으로써 미·소는 핵 균형에 의한 공존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둘째는 소련이 이때부터 이미 중공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권 수립 불과 1년밖에 안 되는 중공은 자의반 타의반(소련의 종용)으로 한국전에 개입했는데 전쟁이 오래 끌면 자연히 북괴에 대한 북경의 발언권이 강화되게 마련이다. 이것은 「스탈린」이 결코 바라는바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하지 못할 바에는 북괴나 중공이 아직 자기 손아귀에 들어있는 동안에 휴전으로 끝장내자는 것이 소련으로서는 이로운 것이다.
세째는 소련과 중공은 앞으로 다가오는 「샌프란시스코」의 대일 정화조약 회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 특히 중공으로서는 일본의 재생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이 계속되면 일본 재대두는 가속화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휴전을 통해 이를 방해 내지 둔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벌써 일본공업은 한국에서의 열전으로 거대한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네째로 공산주의자들은 남침으로 이루지 못한 이승만 실각을 휴전으로 성취하려는 심산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과 미국 대립시키려>
공산주의자들은 통일 이외의 어떤 해결방안도 거부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회담 개최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질 것이며 「유엔」군사령부와 대립하여 결국 실각하라 라고 계산했다. 공산 측의 이런 계산은 부분적으로 들어맞았지만 그들이 노리는 종국적인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이 대통령은 휴전 회담을 정면으로 반대하여 「워싱턴」과 「유엔」군사와의 관계도 긴장했지만 온갖 역력에 반석처럼 버티어 국가이익을 최대한으로 쟁취했다. 이 대통령의 정치적 역량이나 성가는 휴전회담의 시련을 겪으며 더욱 빛났다. 이 점은 나중에 소상히 다루겠다.
여하간 공산 측은 이상 열거한 이유와 동기로서 한국 휴전회담 개최가 자기들에게 백방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래서 6월23일의 「말리크」제의가 나오게 된 것이다. 여러 유인과 탐색기구를 통하여 공산 측을 휴전 탁자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던 미국은 「말리크」제의가 나오자 재빠르게 이를 받아들였다. 「말리크」제의 2일 후에 「트루먼」대통령은 미국은 과거에도 늘 그랬듯이 이제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참가할 용의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6월30일에 「유엔」군 총사령관 「매듀·B·리지웨이」대장은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공산군 사령관에게 『나는 귀하가 한국에서의 모든 군사행동과 적대행동을 중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보장이 있는 휴전 회담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덴마크」 병원선 「주트란디아」호를 원산항에 정박시키고 그 선상에서 그런 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미국 군사령관으로서는 적의 항복을 요구하지 않는 특기할만한 제안이었다. 적의 무조건 항복이 목표라고 선언한지 불과 10년도 못돼서 일어난 일이며 이것은 전쟁에 대한 미국의 사고방식에 있어 외교적 정치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리지웨이」제의 다음날인 7월1일에 김일성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덴마크」병원선 대신 개성에서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의 어느 날을 택해 첫 회담을 열자고 회답해 왔다. 이 회답을 통해 공산 측은 중공군 사령관 이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7월3일에 「리지웨이」장군은 한국에서의 유혈을 빨리 끝내고 「유엔」군사령부의 선의를 보이기 위해 공산 측의 개성 회담 안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필요한 준비를 마련하기 위해 7월5일에 연락장교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7월4일에 공산 측은 연락장교 회의는 5일이 아니고 8일에 개최하자고 재의 해왔는데 「리지웨이」는 5일에 그들이 제의한 회담일자에도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쌍방은 「말리크」제의가 나온지 불과 12일만에 휴전 회담 개최 일자와 장소에 합의를 볼 정도로 신속히 움직였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엔」군사령부가 처음부터 회담장소나 개최 일자에 대해 공산 측에 일방적으로 양보했다는 점이다. 특히 회담 장소를 공산 측 제의대로 개성으로 택함으로써 「유엔」군 측은 나중에 큰 수모와 곤경을 겪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그 지역 일대를 적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공산 측은 애초부터 치밀한 계획과 책략으로 휴전 회담에 임한데 반해 「유엔」군사령부는 너무도 안일하게 회담 전망을 평가했던 것이다.

<유엔사, 한 달이면 휴전될 줄>
그 일례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C·터너·조이」제독은 7월6일에 『공산 측이 중립국 선상에서 회담 개최를 꺼리는 것은 이해할만하며 개성은 피아가 다 지배하지 않는 무인지대이기 때문에 회담장소로 수락할만하다』고 논평하였다.
7월9일자 미국의 「뉴·리퍼블리」지도 「덴마크」병원선 「주트란디아」호는 기술적으로 「유엔」영역인데 「유엔」기구에 들어오지 못한 중공과 북괴가 이를 거부한 것은 사면유지 때문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공산 측은 중립국 선박이나 체면유지 때문에 「주트란디아」호를 기피한게 아니고, 개성에 미리 함정을 마련해 놓고 이곳을 회담 장소로 내세웠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다. 또한 「말리크」제의 2주만에 쌍방 대표회담이란 신속한 「템포」에 고무되어 길게 잡아도 한 달이면 휴전회담을 매듭 질 수 있다는 「유엔」군사령부의 판단도 엄청난 오산이었음이 드러났다. 7월8일에 막을 연 휴전 회담은 2년17일이나 걸렸으니까 말이다.
◆주요일지(1951년7월4·5·6일)
※7월4일▲아군 탐색대, 개성 돌입 후 철수 ▲공산 측, 8일에 연락 장교회의 개최 제의 ▲이묘묵 주영대사, 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영 정부에 전달
※7월5일▲「리지웨이」, 공산 측의 8일 회의 제의에 동의 ▲국민 방위군사건 재심군재 개정 ▲「뉴요크」 주지사 「듀이」씨, 「리지웨이」장군과 요담
※7월6일▲「유엔」군, 다시 개성부근 탐색 ▲미 극동 공군 사령관, 적 대표 통로와 개성주변 5마일 이내 폭격 금지령 ▲임표와 「마리노크스키」소 극동군 사령관, 「모스크바」에서 회담 ▲소련의 「이즈베스티야」지, 미의 대일 강화태도를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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