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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훈련기, 페루 수출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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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박희권
주 페루 대사

11월 6일 페루 리마 공군클럽에서는 역사적인 행사가 열렸다. 바로 한국 기업이 생산하는 국산훈련기 KT-1기 20대의 수출계약 서명식이었다. 한국의 기술력으로 설계·생산한 비행기가 최초로 중남미에 진출하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페루 국방장관이 축사에서 “한국 대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고와 열정이 없었더라면 이 계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세 차례나 언급했을 때는 벅찬 감동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 협상 타결에는 양국 정상 간의 깊은 신뢰와 유대가 원동력이 됐다. 한국의 높은 기술력과 경제성이 타국의 경쟁사를 앞질렀다. 이번 계약이 정부 대 정부 형식으로 체결되면서 KOTRA와 방위사업청도 힘껏 지원해 주었다.

 한국 훈련기의 페루 진출은 여러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우선, 그동안 중남미지역 항공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경쟁사와의 숨가빴던 수주전은 흡사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번 진출로 우리는 중남미 항공기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둘째, 이 계약은 정부 대 정부 형식으로 체결된 최초의 계약이다. 실제 공급사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라는 민간회사인데 페루 국내법상 계약 이행을 한국 정부 기관이 보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보증의 주체·형식을 어떻게 계약서에 담느냐, 또 상이한 양국 법절차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은 전문성과 협상능력의 시험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으로 방산 진출을 확대하기 위해 정부 간 협력을 위한 법제도를 완비하는 것은 향후 과제로 남았다.

 셋째, 이번 계약이 성공적으로 타결됨에 따라 앞으로 한국·페루 관계는 방산협력뿐 아니라 여타 인프라, 자원·에너지 등으로 확대·심화될 것이다.

 넷째, 이번 계약 성사에는 전략적 접근이 주효했다. 지난해 6월 오얀타 우말라 페루 대통령은 당선 후 며칠 만에 외교단 중 처음으로 필자를 접견한 기회에 기술개발을 통한 국가발전 철학을 피력했고 한국은 이를 감안해 기술이전을 통한 공동생산 전략으로 호응한 것이 적중했다.

 마지막으로, 금번 계약은 인내와 끈기의 열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정부가 바뀌었고 필자가 접촉했던 국방장관도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 대규모 사업승인을 위한 페루 내 복잡한 내부절차와 의사결정 과정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적시에 파악하는 것은 물론 침착하고도 끈기 있게 자신을 통제해 나가면서 관계·언론계·의회 지도자 등 수많은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지원을 이끌어 내야 했다.

 국제 협상은 국익을 걸고 하는 총성 없는 전투다. 효과적인 전략, 치밀한 논리와 탁월한 협상능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치열한 전투에서 돌아와 가쁜 숨을 고르면서 다음을 계획한다. 페루가 방산협력을 넘어 자원·에너지, 통상,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의 핵심 우방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박희권 주 페루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