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깊은 속'이 없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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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벌써 몇 달째 북핵위기를 걱정하면서도 정작 북핵의 실상은 모르고 있다. 북한이 정말 핵탄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 농축우라늄 핵탄을 정말 만들 작정인지 협상용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뿐 아니라 미국.일본도 정확한 진상을 모른다. 심지어 북한이 미국특사에게 핵개발 프로그램을 왜 시인했는지도 잘 모른다. 증거를 들이대니까 마지못해 시인했는지, 의도적인 시인인지도 관측이 헷갈린다.

핵문제 뿐이 아니다. 북한은 남북대화에서도 속을 열지 않는다. 필요한 때 필요한 제안, 필요한 합의만 할 뿐이다. 대화를 하면서도 언제 그 대화를 중단할지, 언제 다른 조건을 내세울지 항상 알 수 없는 것이 북한이었다.

반면 남한은 다르다. 남측은 시종일관 대화와 교류.협력을 바란다. 북측이 약속을 깨든 말든, 비난받을 짓을 하든말든 남측은 전천후로 대화.교류를 원한다. 심지어 서해에서 우리 함정을 격침하고 우리 장병을 살해해도 변함없이 대화와 교류는 물론 금강산관광까지도 이어진다.

이처럼 북측은 늘 모호하고 남측은 늘 투명하다. 이런 양쪽의 다른 입장이 현실로는 어떻게 나타날까. 우선 김정일은 남측의 속 생각을 다 아니까 무슨 짓을 하든 남측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해상도발을 해도, 핵을 개발해도 남쪽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염려가 없음을 미리 알고 있다.

*** 북은 모호한데 남은 투명

귀중한 현금을 안겨주는 금강산관광은 계속되고 도로.철도연결도 남쪽의 자재지원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속도로 추진할 수 있다.

대화를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그만 두면 그뿐이다. 외국언론들은 사교(邪敎)집단이니 과대망상 독재자니 하고 북한정권을 비난하지만 남쪽에서는 당국도 언론도 그런 비난을 하지 않는다. 기껏 "핵은 용납 못한다"고 할 뿐이다.

반면 남측은 북측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늘 눈치를 살피는 입장이다. 대화를 하자,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자고 늘 부탁하는 입장이다. 지난해에 했으니까 올해도 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북측이 대화에 응해주면 고맙게 생각하게 되고 고마워서 뭔가 퍼주고 싶어진다. 대화의 시기.장소.격 같은 걸 따질 여유가 없다. 그러니까 대화의 주도권은 늘 북측이 쥐게된다.

모호성의 위력과 투명성의 취약성은 이처럼 크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지난 5년간 DJ식 햇볕정책에서 분명히 보아 왔다. 남북대화와 교류.협력은 반드시 해야 한다. 햇볕정책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도 적다. 그러나 우리 속을 미리 다 내보이는 이런 식의 대화는 이제 끝내야 할 것이다. 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대화.교류를 위해서도 우리 속을 좀더 깊이 묻어둘 필요가 있다.

북측도 우리 속을 몰라야 우리 눈치를 살피게 된다. 대등하고 진지한 남북대화도 그래야 가능해진다.

가령 최근 미국언론이 '맞춤형 봉쇄'가 미국의 북핵대응책이라고 보도했을 때 DJ는 즉각 이를 큰 소리로 반대했다. 아마 북한은 이 보도에 처음 긴장하면서 남측의 반응을 주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DJ가 반대를 밝혔으니 쉽게 안도했을 것이다. 만일 DJ가 자기 의견을 조용히 미국정부에 통보하고 겉으로는 당분간 입을 닫고 있었던들 북한은 상당한 압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며칠 후 뉴욕 타임스는 "이제 북한보다 남한이 미국외교의 더 큰 문제"라고 했다.

대화를 하려면 카드를 가져야 한다. 우리 속을 다 까보이면 남는 카드가 있을 수 없다. 북핵을 대화로 푼다고 하는데 북측에 내밀 우리의 독자적인 카드가 과연 있긴 있는가.

북핵 때문에 교류.협력이나 금강산관광을 중단하진 않을 것이란 말은 미리 다 해버렸다. 실제 중단하지 않을 방침을 정했더라도 그 말을 그렇게 빨리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처럼 자기 속을 미리 다 알게 해주는 남한을 북측이 어떻게 보겠는가.

*** 속 다 보여주면 무슨 카드?

온건.강경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와 지도자는 좀더 속이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 촉새처럼 빠른 입은 국익과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기 쉽다. 대한민국이 톡 건드리면 속이 다 보이는 그런 나라가 돼서는 안된다.

교류.협력을 할 때 하더라도, 줄때 주더라도 여건이 무르익고 우리 입장이 가장 강화될 때까지 속을 보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의 운신 폭도 커지고 상대도 이 쪽을 더 무겁게, 어렵게 알게된다. 새정부에서는 이런 점이 우선적으로 유의되길 바란다.
송진혁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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