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영휘 유산 1200만원 놓고 아들끼리 법정 소송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6호 26면

경기도 여주에 있는 감고당.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이전복원했다. 감고당은 원래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의 사저였다가 고종비 명성황후를 거쳐 민영휘의 소유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1935년 12월 만 여든 셋에 세상을 떠난 민영휘의 인생 자체가 큰 화제가 되었다. 민영휘는 대한제국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의정부 총리대신에 해당하는 최고의 품계를 받았다. 그럼에도 일제로부터는 1910년 10월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5만원의 은사금까지 받았다. 동학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란 비난도 받았고, 친일 김홍집 내각이 집권하자 청나라 군대에 숨어서 청나라로 망명했지만 다시 일본으로 말을 갈아타 자작까지 되었다.

삼천리에서 ‘(민영휘가 세상을 떠나자) 수(壽), 부(富), 귀(貴)가 많은 남자로서 와석종신(臥席終身:집에서 누워서 죽음)한 그의 일대의 영화는 자못 세상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라고 말한 것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민영휘가 죽자 많은 사람의 관심사는 그가 남긴 유산 규모와 이를 누가 차지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① 민영휘 부자(2)

삼천리 1936년 6월호는 ‘민영휘의 재산이 한때는 4000만원에 달했는데 이는 일본의 스미토모(住友)·미쓰비시(三菱)·미쓰이(三井)에는 비길 수 없다 해도 제2류(第二流)에는 갈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삼천리 1938년 10월호는 민영휘를 “조선에서는 고금 몇 백 년 내에 처음 보는 큰 부자”라면서 그가 남긴 재산 규모가 ‘3000만원 혹은 2000만원이라고 말하지만 확실한 측의 조사에 의하면 1200만원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의 재산은 동산과 부동산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부동산이 전국에 산재해 있어 정확한 액수를 알기 어려웠다. 또 상해(上海)의 외국 은행과 일본에 숨겨둔 재산이 있느냐 여부도 논란거리였다. 민영휘를 총애하던 고종이 강제 양위를 당하자 그에게 재산을 빼앗겼던 백성들이 난입했기 때문에 민영휘는 상해로 도주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그가 죽자 “상해 외국 은행에 저금한 돈이 있느니 내지(內地:일본) 무슨 회사에 비밀히 투자한 돈이 있느니, 있는 풍설, 없는 풍설 자자했다”고 삼천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영휘, 여성 편력 심해 첩이 5~6명
민영휘의 유산은 동일은행(東一銀行:옛 한일은행)을 비롯한 각종 주권(株券)이 약 100만원 정도로 추정되었고, 한 해 8만 석을 수확하는 광대한 농토가 약 1000만원 정도로 추정되었다. 민영휘가 13도를 돌아다니며 고르고 고른 옥토양전(沃土良田)이었다. 그 외에 경운정(慶雲町:현 종로구 경운동) 64번지 1600평의 사저, 가회정(嘉會町:현 종로구 가회동)의 아방궁 같은 별장, 그리고 종로를 비롯한 서울 일대에도 부동산이 즐비했다. 민영휘의 경운정 사저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 이갑(李甲)이 야반에 뛰어들어 돈을 요구해 오성(五星)학교를 지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담긴 집이었다.

동일은행(왼쪽)과 한성은행. 모두 조흥은행의 전신이다. 민영휘 부자가 농업부호에서 금융부호로 넘어가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최소 1200만원에 달하는 민영휘의 유산을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갈까. 쌀값을 기준하면 1934년 쌀 1석(160kg) 가격이 22원30전이다. 이를 현재의 10kg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1600억원을 넘는다. 경성부관내지적목록(京城府管內地籍目錄:1927)은 민영휘 일가의 경운동·관훈동 일대 저택들의 면적이 4137평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를 현재의 부동산 가격으로 환산하면 수조원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누린 민영휘였지만 적자(嫡子)만은 갖지 못한 것이 유산 분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방(大房)마마’로 불렸던 정실부인 신씨(申氏)는 자식을 낳지 못해 민형식(閔衡植)을 양자로 들였다. 삼천리는 “민영휘씨는 여성이 많았던 만큼 대방마마를 수위로 평양(平壤)마마, 해주(海州)마마를 차석으로, 연당(淵堂)마마, 무슨 마마 하여 5, 6인의 첩실이 각각 주둔소를 설치하여 가지고 열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중 이른바 해주마마가 민대식(閔大植)·천식(天植:사망)·규식(奎植)의 아들 셋을 낳아서 가장 세력이 왕성했다.

황현은 매천야록 1909년조에서 “민영휘의 양자 민형식은 선비이므로 의리를 숭상하여 금전을 잘 쓰고 다녔는데 민영휘는 금하지 못하여 거의 윤리를 상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또 그의 서자(庶子) 민대식(閔大植)은 방탕하고 간사하여 날마다 많은 돈을 썼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매천야록 1909년)”고 드물게 민형식을 칭찬하고 있다. 민영휘의 양자 민형식에게는 삼천리도 “온후하고 장자의 풍이 있어 궁한 사람을 구하고 없는 친척을 돕는, 민씨가(閔氏家)의 전통을 깬 반역아(?)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민형식은) 완전히 거세를 당하여 명목만 장자로 있게 되어 그의 생활은 궁핍한 정도에 있었다(삼천리 1938년 10월)”고 전해진다. 민씨가의 전통과는 달리 ‘궁한 사람을 구하고 없는 친척을 돕는’ 선행을 했다고 집안에서 축출되다시피 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민형식은 1931년 11월 20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까지 받았는데 이 사건은 장안의 큰 화제였다. 민형식은 구자흥(具滋興)에게 8만원을, 원산의 박홍수(朴鴻秀)에게 2만1000원을 빚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남을 돕다가 발생한 빚이라는 것이 세간의 시각이었다.

별건곤 1932년 6월호에 따르면 민형식은 조선일보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말을 듣고 두 차례에 걸쳐 유진태 등에게 1만8000원의 약속수형(約束手形)을 써 주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민형식의 아들 민병주가 유진태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별건곤은 ‘민영휘는 자신이 이 빚을 갚아주면 민형식의 허다한 채권자들이 모두 그 수단을 써서 가산이 탕패할 것이기 때문에 창피를 무릅쓰고 손자 민병주를 시켜 유진태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고 보도하고 있다.

민형식 쪽엔 김병로·이인 등 항일 변호사
민형식은 당대의 명필이기도 했다. 삼천리 1932년 3월호는 “우하(又荷) 민형식씨라면 서화계(書畵界)에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면서 “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미덕이 빌미가 되어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말까지 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도 “민대식은 재계에 상당한 이름이 있으면서도 사회적 사업에는 극히 냉담하다”고 비판했다.

민형식은 민영휘 사망 이듬해인 1936년 7월 16일 자작 작위를 습작하면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작위를 습작했으므로 재산 상속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었다. 민형식은 부친의 3년상이 끝난 후 민대식 등을 상대로 유산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이른바 해주마마라고 불렸던 소실 안유풍 소생의 대식·규식 형제를 상대로 경성지방법원에 ‘유산 전부의 신탁을 해제하고 분배 정리를 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민영휘는 원래 장남 형식을 관계(官界)로 보내고, 차남 등은 재산을 관리하는 후계구도를 짰었다. 그래서 민형식은 고종 29년(1892) 문과 급제 후 부친의 후광으로 고종 39년(1902)에는 평안도 관찰사, 고종 43년(1906)에는 학부협판(學部協判) 등을 역임했다.

삼천리는 “민영휘 자작은 생전에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는 한편 축재(蓄財)에도 비상한 노력을 다해서… 관권을 이용해 불법 축재한 것이라고 세평이 험악했다”고 전하는 한편, 민형식에 대해서는 “원래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에 뜻을 두고 서도(書道)와 문학에 전념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민형식의 성향을 틈타서 민대식 형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할 때 대부분의 부동산을 자신들의 명의로 신고하고 은행 주식도 자신들의 명의로 돌려놨다.

그럼에도 민형식은 이 재산을 민대식 형제에게 신탁한 것으로 여기고 장남 병주에게 수익금 일부를 받아오게 했는데 민대식이 그때마다 차용증서에 날인하게 하자 의심이 생겼다. 그후 재산 정리를 요구하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응하지 않기에 삼년상이 끝난 후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삼천리 1938년 10월호)

민대식 형제가 관리하는 재산은 자신이 신탁한 것이라는 민형식의 주장과 민영휘가 생전에 증여한 것이라는 민대식의 주장이 맞선 것이었다. 이 소송은 변호인들의 성격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민형식 쪽의 변호인들은 김병로(金炳魯)·이인(李仁)·신태악(辛泰嶽) 등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던 항일 변호사들이었던 반면 민대식의 변호사는 친일단체였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경성지부장을 맡은 이승우(李升雨) 등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산소송은 민대식 형제에게 유리하게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민형식은 1938년 경운정 저택까지 경매에 내놔야 했지만 민규식은 1940년 동일은행 취체역 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삼천리 1940년 6월호는 소설가 박계주(朴啓周)가 동일은행 취체역 회장 민규식에게 인생관과 황금관을 묻자 민규식이 “나는 무엇보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내 자손에게라도 내 재산을 상속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호언했다. 물론 허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해방 후인 1947년 5월 14일 자유신문은 우하 민형식이 47년 5월 14일 명륜동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데라우치 암살 사건에 관련돼 복역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게 돈의 역사도 그릇된 역사의 한 부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