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뻣뻣한 남자 유연한 여자 남자의 필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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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모처럼 친구를 만났다. 늦가을 햇살이 길게 스며든 시청 옆 카페.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별로 할 말이 없다. 침묵 끝에 던지는 친구의 질문이 뜬금없다. “누가 될 것 같으냐?” 그래도 언론계에 있으니 뭐 좀 알 것 아니냐는 거다. “야, 내가 그런 걸 알면 진작 미아리에 돗자리 깔았지.” 시큰둥한 대꾸에 희미하게 웃는다. 몇몇 친구의 근황을 주고받고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문다.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 하지.” 친구의 제안에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같은 시각, 건너편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여자. 한 여자는 말을 하고, 한 여자는 듣고 있다.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말하는 여자의 입은 잠시도 쉬지를 않는다. 듣는 여자는 상대와 눈을 맞추고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맞아.” “그렇지, 정말 그럴 거야.”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해.” 추임새 같기도 하고 맞장구 같기도 한 말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둘은 가끔 손뼉을 치며 함박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남자의 종말(The End of Men)』이란 ‘무시무시한’ 책을 읽고 있다. 미국의 여성 칼럼니스트인 해나 로진이 쓴 책이다. 남성성이 지배하던 가부장(家父長)적 시대가 가고, 여성성이 지배하는 가모장(家母長)적 사회가 도래하면서 남성우월적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사회적 지능과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이 중요한 구조로 경제가 바뀌면서 ‘뻣뻣한 남자’보다 ‘유연한 여자’가 훨씬 뛰어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연성에서 남자는 여자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다.

 갈수록 꼰대 스타일, 아저씨 스타일이 돼간다는 게 아내와 딸의 나에 대한 불만이고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요컨대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우연히 카페에서 엿들은 두 여자의 대화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여자의 ‘공감(empathy)’ 능력이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그 말을 헤아려 공감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남자는 여자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갈수록 소통이 중요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남자가 처한 위기의 본질이 바로 이것 아닐까.

 모 대학 남자 교수의 노래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다. 그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꽃 중의 꽃’이란 곡을 개사해 부른다. “꽃 중의 꽃, 근혜님 꽃, 8000만의 가슴에, 피어라 피어라, 영원히 피어라…별 중의 별, 근혜님 별, 8000만의 가슴에, 빛나라 빛나라, 영원히 빛나라~” 두 손을 연단 위로 모으고 열창하는 그의 표정에선 신성한 경외(敬畏)마저 느껴진다. 한 네티즌은 “지능적 안티?”라는 의미심장한 댓글을 남겼다. 남자의 종말!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남자의 위기 맞다.

글=배명복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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