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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고기 질려 샥스핀 요리점 갔더니…허걱, 한 끼 18만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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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호 24면

허난(河南)성의 수도 정저우(鄭州)에서 우연히 포착한 중국 사회의 양극화 현장. 왼쪽은 호화로운 시화위안(西花園) 비즈니스클럽과 내부 모습. 오른쪽은 고가도로 밑에서 노숙하는 농민공들이다.

양떼들이 자주 눈에 띈다. 시작은 허난(河南)성 남쪽의 어느 성도(省道)에서였다. 떼지어 가는 걸 보고 급히 자전거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는데 지금은 보고도 심드렁하다. 상하이와 시안을 연결하는 310번 국도를 ‘누들로드’라고 부른다면 시안에서 뤄양(洛陽)·정저우(鄭州)·카이펑(開封) 등 고대의 왕도들을 연결하는 310번 국도는 ‘양떼의 길’이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28> 羊과 농민공

원래 광활한 중원의 풀을 뜯어 먹던 양들은 초원이 개간돼갈수록 먹잇감이 줄어들자 길가의 자투리 땅이나 강둑의 비탈에서 눈칫밥을 먹는다. 이쪽 풀을 다 먹으면 길을 건넌다. 심지어 왕복 10차로 정카이(鄭開) 대도에서도 손도 안 들고(흠, 당연하겠지, 대신 뿔을 세우고) 횡단하는 양떼도 봤다. 초원이 없는데도 제사용 양이라도 키워보려고 헛힘을 썼던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정경이다.

날마다 양고기 탕에 빵·두부·국수
중국 문명에 대한 동물들의 기여도를 가린다면 양은 소와 함께 우승 후보다. 중국에서 인기 있는 어린이용 TV 만화 ‘시양양(喜羊羊)’을 보면 올해가 양력(羊曆) 3520년이다. 이 만화에서 시양양은 양을 잡아먹으려는 후이타이랑(灰太狼)이라는 이리를 골탕 먹이고 항상 양족(羊族)을 지킨다. 그런데 중국의 신석기 유물에서도 양을 그린 도기들이 나오니까 양력은 5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마땅하다. 양은 화하문명을 유목시대에서 농경시대로 인도했다. 농업은 위험한 창업투자였다. 병충해와 풍수해로 흉년이 들면 일하는 소는 잡아먹을 수 없고 양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결국 신석기 농업의 실험은 안정화됐고 중국인은 양을 하늘이 내려준 축복으로 여겼다. 그래서 전한의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는 ‘양(羊)이 길할 상(祥)이어서 제사에서 쓴다’고 썼다. 제사할 때 다른 동물을 잡기도 하지만 희생견이나 희생우는 어감이 어색하다. 희생양(犧牲羊)으로 굳어진 것을 보면 양의 상징성을 알 수 있다.

칭다오나 옌징 맥주와 함께 먹는 양꼬치구이는 노린내가 덜 나서 항상 먹을 만했다.

양에 대해 심드렁해진 이유는 또 있다. 처음엔 궁금해 양고기탕을 시켜 먹곤 했다. 생각보다 노린내가 적었고 국물이 진했다. 그것이 시안까지의 소감이었다고 하면 그 이후부터는 물리기 시작했다. 양탕에는 탕에 기대하는 ‘시원함’이 없다. 링바오(靈寶)에서 사 먹은 양러우파오모(羊肉泡<9943>)는 양탕에 효모를 넣지 않고 구운 빵을 뜯어 넣어 건져 먹는다. 처음 먹은 것이라고 하면 맛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뤄양의 회족 거리에서 먹은 완쯔탕(丸子湯)도 마찬가지다. 스크램블처럼 작게 뭉친 두부를 둥둥 띄운 양탕에 역시 빵을 뜯어 적셔 먹는 것인데 국물이 곰탕처럼 맑았다.

문제는 매일 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국수를 시켜도 양고기 국물이 기본이다. 산시(陝西)성 장례식장에서 얻어먹은 고양이귀국수(猫耳朶)도, 퉁관(潼關)에서 사 먹은 치란자오즈몐도, 요동에서 대접받은 국수도, 몐츠현에서 사 먹은 후이몐(<71F4>麵), 그리고 뤄양의 맛집 린쟈반점에서 먹은 다오샤오몐(刀削麵)도 모두 양고기 국물이다. 양에게 노린내는 낙지에게 먹물과 같은 자위 수단이다. 노린내가 역해 양고기를 못 먹는 중국인도 꽤 있다고 들었다. 먹는 사람들도 이 노린내를 구수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센 불로 탕을 끓이면서 무·고수·파·산초·계피·팔각·고추·목이버섯·육두구·마늘·라일락·백지·식초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향신료를 양탕에 투하한다.

또 다른 노린내 제거법은 생선과 함께 끓이는 것이다. 왼쪽은 물고기 어(魚)자, 오른쪽은 양(羊)으로 이뤄진 신선할 선(鮮)자에서 힌트를 얻은 모양이다. 비린내와 노린내를 서로 이이제이(以夷制夷)시켜 둘 다 사라지게 하면서 새로운 맛을 우려내자는 것. 양고기 속에 물고기를 넣어 끓인 양팡짱위(羊方藏魚)나 물고기 배 속에 양고기를 넣은 위푸장양(魚腹臟羊)이라는 요리명이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어양탕을 시도하곤 한다. 문제는 잘못 끓이면 물고기의 육질은 푸석해지고 양고기는 딱딱해진다는 점. 게다가 비린내와 노린내의 몽환적 조합으로 토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식감이 나올 수 있다. 그걸 별미로 여기는 사람이 중국에는 반드시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제발 오늘만은 양고기 국물이 아니었으면’ 기도하는 심정이다. 방법은 좋은 식당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좋아도 너무 좋은 식당을 골랐다. 정저우의 비사강(碧沙崗) 공원 남쪽에 있는 시화위안(西花園) 비즈니스클럽은 내가 중국에서 본 식당 중에서 제일 화려했다. 하얀 돔 건물을 중앙에 두고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듯 2층짜리 건물을 좌우로 이은 거대한 서양식 건축물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딱히 집어내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짝퉁을 산적이 사는 소굴이라는 뜻의 산자이(山寨)라고 한다. 감시의 눈을 피해 이런 곳에서 짝퉁을 만들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한마디로 ‘산자이’ 미국 국회의사당처럼 생겼는데 정무를 보는 게 아니라 전복과 상어 지느러미를 판다. 1991년 세워진 광둥요리 전문점이다.

행색에 신경 쓰였지만 ‘어쨌든 손님인데’ 하는 마음으로 정문을 통과했다. 정원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했다. 경비원이 나를 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 현관 앞에 흙 범벅 된 자전거를 세우고 자물쇠를 잠근 뒤 태연하게 들어갔다. 돔 건물 내부는 진짜 미 의사당 내부처럼 거대한 회랑과 홀로 돼 있고 식사를 할 수 있는 방은 건물의 날개에 있었다. 근처 관공서에서 온 손님들의 복장에 비춰 내 쫄바지가 본의 아니게 식당의 권위를 비웃는 것 같다. 한쪽 벽면은 어항이었고 어항에는 온갖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신기해 2층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어대니까 무전기 든 남자가 1층에서부터 달려오는 게 회랑에서 내려다보인다. 그는 테러분자를 적발한 듯 내 팔을 잡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어 제복을 입은 여자 매니저가 “무슨 일이냐”고 다가왔다. “점심 먹으러 왔다”는 얘기에 웃음기가 엷게 번진다. 하지만 사근사근하게 “여긴 상 단위로 음식을 차린다”고 말했다. 한국말로는 한 상 차림이다. 나는 호기롭게 “그래서 얼마냐”고 물었다가 한 상에 1000위안(약 18만원)이 넘는다는 말을 듣고 “다 먹을 수가 없겠네”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에 여러 사람과 같이 오라”고 내 체면을 수습해준 뒤 명함을 건네줬다.

좋아도 너~무 좋은 식당 고른 죄
뤄양과 카이펑의 중간에 끼여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왔던 정저우가 회생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당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청대에 부설한, 베이징과 광저우(廣州)를 연결하는 남북의 징광셴(京廣線)과 동서를 연결하는 룽하이셴(<96B4>海線)의 철로가 정저우에서 교차했다. 남북과 동서 대동맥의 결절점이 된 정저우는 카이펑을 딛고 허난성의 수도로 올라섰고 2010년 현재 인근 소도시와 현의 인구를 합쳐 거의 1000만 명의 행정구역이 됐다. 그 개발 과정에서 땅을 파헤치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3500년 전에는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하(夏)의 도읍도 정저우 부근에 있는 덩펑(登封)시였을 것으로 추론되고 안양(安陽) 이전에 상(商)의 수도였을 개연성은 더 크다. 7㎞짜리 토성의 유적도 1980년대에 발굴됐다. 역사적 정통성까지 확보하게 된 정저우는 내친김에 중국 8대 고도 대열에 최근 합류했다.

정저우의 위대한 재탄생 이면에는 그늘도 깊다. 제팡루(解放路)는 정저우에 번영을 수송한 철로 위를 가로지른다. 이 고가도로를 넘어가자 허난 농촌인력자원시장이 나오고 이 앞에서 수십 명이 실랑이를 벌였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보는 몸싸움이다. 몸싸움은 이내 진정됐지만 더 놀란 것은 사람들이 고가도로 밑에 발 디딜 틈 없이 빽빽이 자리를 펴고 누워 있다는 점. 일자리를 찾지 못한 농민공(農民工)들이다. 미국도 워싱턴과 시카고의 남부를 가면 폭격 맞은 것처럼 부서진 집에서 흑인들이 산다. 하지만 여기는 헌법상 사회주의국가 아닌가. 장기간 노숙한 듯 여기저기서 진동하는 썩고 쉰 냄새는 중국의 사회안정에 대한 물음표를 내게 처음으로 던졌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이 순한 양 같기를 바랐던 것 같다. 통치자의 언어였던 한자에서 양이 들어간 글자 중 부정적인 뜻은 별로 없다. 아름다울 미(美), 착할 선(善), 의로울 의(義), 키울 양(養)…. 한자를 배우면서 양의 가치를 내면화한다. 관리들에게 수탈당해도 천하대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상은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수치상으로 중국은 상·하위 계층의 소득 격차가 미국보다 더 큰 나라가 됐다. 이 추세를 조사하려면 어려운 방법론을 고안할 필요 없이 여기 와서 시화위안과 고가도로 밑을 보면 될 것 같다. 시화위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데 동시에 고가도로를 지붕 삼아 눕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언젠가 경보가 울릴 것이다. 누워 있는 양들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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