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릭의 사색을 스필버그의 동화로 'AI'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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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찾기 힘든 완벽한 순수함. 스필버그를 사로잡는 것, 그리고 그의 영화가 관객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는 원인은 바로 이것 아닐까. 'A.I'는 이미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많은 화제를 뿌린 바 있다. 다시 언급하자면, 고인이 된 거장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프로젝트를 스필버그 감독이 대신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필버그가 큐브릭 감독에게 남다른 존경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큐브릭 감독은 언제나 영화의 기술적 혁신, 장르영화에 관한 남다른 안목, 그리고 세인들의 찬반논쟁을 일으키곤 했던 연출자였으므로. 상업감독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거장'이라는 찬사와는 다소 거리가 먼 스필버그 감독으로선 'A.I'는 욕심낼만한 프로젝트였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A.I'는 큐브릭 감독의 이름을 빌린, 스필버그의 영화가 되고 말았다.

'A.I'는 한편의 동화 같은 내용을 담는다. 먼미래, 하비 박사는 감정을 지닌 로봇을 개발한다. 그 결과가 데이비드라는 로봇. 데이비드는 사이버트로닉스사의 직원인 헨리와 모니카 부부에게 입양된다. 이들 부부는 아들 마틴이 거의 식물인간인 상태. 모니카는 데이비드의 존재를 꺼려하지만 차츰 아들로서 대하게 된다.

그런데 마틴이 퇴원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자 데이비드는 모니카는 폐기처분될 것이 두려워 길가에 데이비드를 버려놓는다. 언젠가 들었던 '피노키오' 동화를 떠올린 데이비드는 마법의 힘으로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을거란 믿음으로 길을 떠난다.

영화 'A.I'의 중심엔 데이비드라는 로봇이 있다. 이 로봇의 원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만화 '우주소년 아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인간과 똑같은 내면세계를 지니고 있지만 속은 단순한 기계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로봇이 특이한 구석이 있다. 한번 감정 프로그램이 입력되면 재차 수정할 수 없다.

영화에서 데이비드를 보살펴주는 역할인 모니카는 그를 입양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입력시킨다. 아들로 대해줄 것을 다짐하면서. 그런데 상황이 변한다. 진짜 아들이 돌아오고 상황이 변하자 모니카는 더 이상 데이비드를 아들로서 대할 수가 없다.

반면, 로봇임에도 데이비드는 "영원한 사랑"을 믿는다. 한번 엄마를 사랑하게끔 명령어가 들어갔기 때문에 변경이 불가능하다. 영화는 이렇듯 과연 인간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시작된 고전적인 물음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A.I'의 상업적인 노림수는 이 질문을 교묘하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으로서 재활용하는 점이다. 기발하다. 데이비드 역을 맡은 할리 조엘 오스먼트는 완벽한 순수덩어리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없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A.I'는 이상한 영화로 보일수도 있다. 아마도 큐브릭 감독의 전작들을 챙겨본 사람이라면 부분적으로 스며있는 그의 영감을 발견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큐브릭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정을 떠난 데이비드가 로봇 폐기물 축제에 참가한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인간들은 쓸모가 없어진 로봇을 모아놓고 그들을 불태우거나 녹여버린다. 그리고는 환호성을 지른다. 광기의 극치다. 사실 큐브릭 감독은 대단한 염세주의자였다.

그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나 '샤이닝' 그리고 '풀메탈쟈켓' 등의 영화를 보노라면 큐브릭 감독이 특유의 완벽주의자 기질을 발휘해 고전적 가치들, 즉 가족이나 국가, 공동체의식 등을 맹렬하게 공격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그는 거장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다.

'A.I'에도 부분적으로 큐브릭 감독의 비관적인 세계관이 엿보이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완전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다. 후반으로 갈수록 'A.I'는 감정을 지닌 로봇의 여정을 예쁜 동화로 포장한다. 영원한 꿈과 사랑이 입력된 데이비드의 처연한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 거다. 차츰 영화는 엄마를 찾는 꼬마 로봇의 소망을 판타지로서 충족시키는 결말로 향한다. 스필버그 감독은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볼수 있는 '신파'로 마무리하면서 모든 갈등구조를 해소한다.

'A.I'는 언제나 그렇듯 관객들의 '아픈'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다. 'ET'에서의 영원한 우정, '쥬라기 공원'에서 위협적인 테크놀로지 강박증,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에서 개인의 양심문제가 그랬듯. '뉴스위크'는 "최근 할리우드 영화중에서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라고 논했다. 틀린 언급은 아니지만, 큐브릭 감독이 이 영화를 봤더라면 만족했을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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