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미국 오락프로는 연예인 없이도 인기

중앙일보

입력

시애틀에 도착하면 당분간 한국 TV와는 결별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는 도착 당일 산산조각났다.

아침 저녁으로 한두시간씩 케이블(인터내셔널 채널) 을 통해 한국의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방송되었기 때문이다.

뉴스도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속속 접수됐다. 연예인들이 자신들을 노예라고 지칭했다고 MBC 출연을 거부했다는 뉴스가 특이했다.

PD들은 걸핏하면 시청률의 노예로 불리는데 그들이 그 호칭 때문에 제작을 거부하지 않는 걸로 보아 PD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간주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미국에 와서도 나의 관심사는 여전히 시청률이었다. ( '노예' 근성에 길들여졌나□) 당연히 시청률조사표에 눈길이 갔다.

닐슨사가 조사한 지난 7월 첫 주의 시청률표를 보고 잠시 놀랐다.

드라마, 그 중에서도 사극이 정복하고 있는 한국에 비해 그 결과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상위 다섯 개 프로그램 중 무려 네 개가 퀴즈 프로그램이다.

'생방송 퀴즈가 좋다' (MBC) 의 오리지널에 해당하는 'Who Wants to Be a Millionaire' (ABC) 는 일주일에 네 차례나 방송되는데 그 네 번이 모두 20위권 안에 들었다.

1위를 차지한 일요일 밤 9시 방송분이 9.4%인데 닐슨의 해설에 따르면 9천6백만 가구가 시청한 것이다.

3위는 바버러 월터스가 진행하는 뉴스쇼 '20/20' (ABC) 이고 퀴즈프로인 'Weakest Link' (NBC) 가 4위다.

이홍렬씨가 진행하는 '퀴즈정글' (KBS2) 과 같은 포맷이다.

얼마 전 '무서운 영화(Scary Movie) 2' 를 보았는데 거기에 이미 이 프로의 한 장면이 패러디돼 나왔다. 관객들이 박장대소하는 걸로 이 프로의 인기가 짐작됐다.

슈퍼볼 같은 초특급 스포츠 이벤트가 없는 경우 시청률 동향은 대개 이러하다고 한다.

왜 그들은 이토록 퀴즈를 좋아할까. 한국의 드라마에서 잃어버린 코리안 드림의 흔적을 탐색할 수 있는데 반해 미국의 퀴즈쇼에는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있는 냄새가 난다.

잘만 하면 일확천금을 순식간에 만질 수 있다. 1백만달러를 걸고 게임을 벌이니 도대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한국처럼 시선을 의식한 '강요된 적선'도 없다. 남자, 여자, 학벌, 피부색의 차별 없이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재미있는 상식으로 아메리칸 드림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는 대리충족감을 맛보는 듯하다.

차제에 한국의 방송도 일반인들을 대거 출연시켜 연예인 위주의 오락프로그램에서 탈피하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그 길이 연예인이나 방송제작진이나 서로 노예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한 돌파구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교수 chjoo@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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