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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도 천리포수목원도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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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강일구]

아마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걷거나 차를 몰거나 심지어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무슨 노래인가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의식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니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읊는 것은 아니고 대개 일정한 소절을 멜로디만 반복하게 된다. 출근길 버스에서 우연히 들은 노래일 수도 있고, 옛날에 즐기던 흘러간 유행가일 수도 있다.

 지난 주말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노래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다. 토요일 서울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린 친지 아들 혼례미사에 갔더니 성가대가 이 노래를 축가로 부르는 것이었다. TV 프로그램에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하다만, 사실 나는 이 유명한 노래를 잘 모른다. 미사 말미에 남녀 합창으로 ‘눈을 뜨기 힘든 / 가을보다 높은 / 저 하늘이 기분 좋아…’라는 곡조가 흘러나오는 순간 그 진지하고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분위기에 마음이 울컥했다. 옆자리 아내에게 무슨 노래냐고 했더니 “콧수염 바리톤 김동규씨가 부른 노래인데 몰랐느냐”며 웃었다. 결혼식 축가라면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김동률의 ‘감사’ 등이 익숙한데. 그러나 생각해보니 지난 토요일은 속이 꽉 찬 10월, 가을의 한가운데였다. 아, 이 노래가 제격이겠구나. ‘창밖에 앉은 / 바람 한 점에도 / 사랑은 가득한 걸 / 널 만난 세상 / 더는 소원 없어….’ 한국 청년과 일본 처녀의 국제결혼이었던 혼례미사는 성가대의 축복과 “독도니 다케시마니, 절대 싸우지 마세요”라는 주례 신부의 농반진반 충고 속에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그런데 일요일에 찾은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에서 또 같은 노래를 들었다. 수목원 내 민병갈기념관 2층 자료실이었다. 반세기 넘게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다웠던 민병갈(1921~2002) 선생의 생전 사진과 식물일지·카드, 손때 묻은 서적들이 전시된 실내에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반복돼 흐르고 있었다. 가사 없는 바이올린 연주인 걸 보면 ‘10월의…’의 원곡인 ‘봄의 세레나데’인 듯했다. 민병갈은 평생 독신이었으니 결혼과 인연이 없다. 생전에 수목원 직원이 결혼하게 되면 축하금을 주고 나서 혼잣말로 “불행을 자초하는 바보”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던 모양이다(임준수, 『나무야 미안해』). 그러나 노래는 30년 넘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에 헌신하고 자기 뼛가루마저 나무에 거름으로 바친 고인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봄의 세레나데’를 연주한 노르웨이 음악그룹의 이름이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이란 점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좋은 곡은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품어준다. 우리들의 뇌도 그걸 알고 좋은 계절을 삿된 생각들로 허비하지 말라며 머릿속에 음악을 틀어주는 모양이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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