財閥<재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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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27면

‘財閥(재벌)’이라는 한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 어원을 보면 그렇다. 글자 ‘閥(벌)’은 ‘門’과 정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伐(벌)’의 합성어다. 고대 중국에서는 군 장수가 싸움에서 이겨 돌아오면 축하 파티를 열곤 했다. 이때 문(門) 밖 왼쪽에 서 있던 공로 병사를 ‘閥’이라고 했고, 오른쪽 병사를 ‘閱(열)’이라고 했다. 지금도 ‘閥閱(벌열)’이라는 말은 ‘공로가 있는 가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門’ 안에 ‘伐’을 쓴 이유 역시 싸움과 관계가 있다. ‘伐’은 ‘人(사람)’과 ‘戈(창)’이 합쳐진 것으로 ‘칼로 목을 베다’라는 게 원뜻이다. 정벌(征伐), 벌목(伐木) 등으로 쓰임새가 발전했다. 결국 글자 ‘閥’은 ‘싸움에서 칼로 적을 여럿 벤 수훈 병사의 집안’이라는 뜻이다.

漢字, 세상을 말하다

글자 ‘財(재)’는 재물을 뜻하는 ‘貝(패)’에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상태를 의미하는 ‘才(재)’가 결합됐다. 말 그대로 ‘돈을 벌고, 쌓아둘 수 있는 것’이 바로 ‘財’다. 이 ‘財’와 ‘閥’이 합쳐져 만들어진 ‘財閥’의 사전적 의미는 ‘돈을 벌어 쌓아둘 수 있는, 여러 분야에서 공이 많은 가족이나 집단’이 된다.

그러나 중국에는 ‘財閥’이라는 단어가 없다. 일본이 만든 말이다. 지금도 중국어 사전에서 ‘財閥’을 찾아보면 ‘19~20세기 일본에서 형성된 거대 금융그룹 집단’이라고 쓰여 있다. 스미토모·미쓰비시·후지쓰 등 당시 맹위를 떨쳤던 기업들의 구조가 일본 전통의 가족체제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말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오늘의 ‘재벌’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 식으로는 ‘대기업 그룹’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각종 특혜를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의 편중 현상이 심화되면서 ‘재벌’이라는 말에는 특혜, 독점, 비리 등 부정적인 의미가 가미됐다. 선거 정국이 되면 ‘재벌 개혁’이라는 말이 꼭 나오는 이유다.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다. 여야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내걸었고, ‘재벌 개혁’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대기업들은 분명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을 것이다. 균형 있게 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 시작은 그들을 ‘재벌’이 아닌 ‘대기업 그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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