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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쟁

연명치료 중단, 가족이 할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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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지난달부터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 필요성과 내용 등에 대한 국민 여론 수렴 작업을 하고 있다. 의료계를 중심으로 “가족의 의사를 반영해 환자가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종교계 등에선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환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두 갈래의 의견을 들어봤다.


대부분 가족이 결정하는 현실 반영해야

허대석
서울대 의대 교수(내과)

매년 18만여 명의 환자가 암과 같은 만성질환으로 오랜 기간 투병하다 말기가 되어 병원에서 임종을 하고 있다. 이런 환자들에게 고통스러운 임종 기간만을 연장시키는 무의미한 의료행위는 의학적으로 추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 3만여 명의 환자에게 사망 전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가 적용되고 있다. 이런 의료행위는 ‘연명치료’가 아니라 ‘연명시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2009년 환자가 임종 과정에 연명시술을 평소 원하지 않았다는 가족의 주장을 받아들여 회생가능성이 없는 경우에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도 된다는 대법원의 판결(김할머니 사건)이 있었다. 이후 사회적 논의와 입법 노력이 계속됐으나 합의를 이루지는 못했다. 가장 큰 쟁점은 가족에 의한 대리결정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환자에게 임종이 임박했음을 정확히 알리고, 임종 과정에서 연명시술을 원하는지 여부를 환자 본인이 사전의료의향서에 작성하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70∼90%에 달한다. 하지만 진료 현장에서의 상황은 다르다. 서울대병원에서 최근 사망한 암환자 317명 중 본인이 사전의료의향서를 직접 작성한 경우는 1%에 불과하다. 의사결정은 본인이 했으나 가족이 대리서명한 경우가 4%이고 나머지 95%는 가족이 대리결정을 하고 있다.

 심각한 질병일수록 환자 대신 가족들이 의사와 상담하는 우리 문화에서 환자 본인이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 대만에서는 2000년 법을 통해 말기환자가 의사를 명확히 밝힐 수 없을 경우에는 가까운 친척 순서로 연명시술 중단에 대한 대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일본은 2007년 정부지침을 통해 환자의 의사확인이 불가능한 때에는 의료진과 가족이 상의하여 환자 입장에서 최선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통보하는 것이 보편적인 미국에서도 1990년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본인이 사전의료의향서에 서명하도록 강력히 권장했다. 그렇지만 20여 년이 지난 현재도 환자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직접 작성하는 비율은 30% 수준에 머물고 있다. 환자가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가족에 의한 대리결정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연명시술 중단에 관한 구체적인 법적 규정이 없다 보니 진료 현장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환자의 평소 가치관과 상관없이 적용된 연명장치의 제거에 대해 생명의 존엄성을 앞세워 반대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반면 보호자들에 의해 연명시술이 거부되는 15만 명 환자의 의사결정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는 드물다. 무의미한 연명시술로 인해 불필요한 고통을 받으며 임종하는 환자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보호자들이 윤리적인 절차를 거쳐 환자 입장에서 무의미한 연명시술에 대한 거부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야 할 때다. 연명시술 중단 절차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규정과 절차를 마련하는 것은 무의미한 연명시술을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임종하기를 원하는 환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교수 (내과)

가족이라고 환자 생명 좌우해선 안 된다

진교훈
서울대 명예교수(철학)

회생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기환자에게 치료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단순히 죽음의 시간만을 기계적으로 연장하게 하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중단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단될 수 있다는 말은 무조건 중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당사자인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가능한 한 존중하면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담당의사는 말기환자에게 완화의료와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등에 대해 사전에 충분한 설명과 상담을 해야 할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품위 유지를 위해서도 시행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담당의사의 권한에 속하는 영역이다. 특히 이해관계가 있는 가족이나 대리인이 함부로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단지 환자 본인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의료 현장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조건과 범위에 대해 의사들 간에도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중지를 모아 하나의 통일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은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나 이 지침이 오히려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교묘하게 악용될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지침은 신중을 기하여 작성되어야 할 것이다. 연명치료 중단조치가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는 행위, 즉 안락사 및 의사 조력 자살과 같은 행위를 허용하는 빌미를 만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환자의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영양·수액 공급과 통증조절 등 기본적인 의료행위는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환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환자와 그 가족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환자는 연명치료 중단과 동시에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받도록 제도적인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임종환자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그 환자로 하여금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충분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임종환자에게 성급하게 연명치료를 중단한다면 환자와 그 가족에게 엄청난 위협과 고통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시행에서 가장 곤란한 경우는 말기환자가 사전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놓지 못하고 연명치료에 대해 사전에 아무런 분명한 의견도 공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을 때다. 이때 환자 가족이나 대리인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한다면 의사는 환자의 가족이나 대리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만일 의사가 가족이나 대리인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이것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 또 가족이나 대리인이 공리적으로, 경제적 논리로, 환자의 본의(本意)에 반하여 요구할 수도 있다.

 한 인간의 생명권과 직결되는 문제를 담당의사가 단독으로 결정하고,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 불확실성이 있을 경우 의사는 그 문제를 생명윤리 분야의 외부 전문가가 포함된 병원윤리위원회에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 병원윤리위원회가 이 문제를 바르게 심의하고 결정하면, 담당의사는 이 결정에 따라 행하면 될 것이다. 정부는 병원윤리위원회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제도적 지위를 부여하여야 한다.

진교훈 서울대 명예교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