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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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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국제문제 대기자

대선에 나선 세 후보들의 캠프에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북적거린다. 그들은 집권만 하면 북한과 한·중, 한·일 영토갈등과 과거사를 포함한 난제들을 단숨에 해결할 기세다. 그러나 한국과 세계의 외교사를 돌아보면 한 나라의 국왕과 대통령과 총리에게 문화적 소양(cultural literacy)으로 무장된 전략적인 사고능력이 없으면 그 나라는 한정된 파이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국제사회에서 소극적으로는 제 몫을 지키고, 적극적으로는 대외적으로 나라의 위상을 높일 수가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학 석좌교수가 지난달 21일 중앙일보에 와서 홍석현 회장과 가진 긴 대담에서 지적한 비스마르크의 전략적인 외교의 사례가 이명박 대통령과 세 대선후보들에게 천금 같은 교훈이 될 것 같다.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러시아의 재상에 취임했을 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이라는 나라는 프랑스 보호국 라인연방, 호헨촐레른 왕가의 프러시아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로 분할되고 그 각각의 나라 안에 수많은 왕국과 공국과 자유시가 난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 전체를 포함한 유럽의 질서는 1814년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이 주축이 되어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들이 출범시킨 빈 체제(Wien system)로 유지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안보에 빈 체제가 필수적이라는 신화를 깨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러시아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해야 하는 벅찬 도전 앞에 섰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마크와 전쟁을 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분할 점령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186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담판하여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밀약을 받아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패배할 것을 확신하고 전쟁을 부추겼다. 1866년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3주 만에 홀슈타인을 점령하고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최후의 일격을 안겼다. 철도로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한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의 획기적인 전략에 오스트리아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몰트케와 휘하 장군들은 빈을 점령하자고 주장했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했다. 그는 후일을 위해서 오스트리아에 더 이상의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러시아의 패전을 바라고 중립을 지킨 나폴레옹 3세는 중립의 대가로 라인강 좌안의 영토를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당연히 거절했다. 빈 체제는 영웅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에 전파한 프랑스 혁명의 효과를 차단·무력화하는 보수체제였다. 그래서 영웅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에게 빈 체제는 눈엣가시였다.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빈 체제에 최종적인 사망선고를 내린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통일된 독일이 등장하여 빈 체제를 대신하고 대륙의 강자가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남부독일 국가들과 비밀동맹을 맺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부터는 중립의 약속을 받아냈다. 몰트케의 주장대로 1866년 전쟁 때 프러시아가 빈을 점령했더라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서 배후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 1868년 공위(空位)가 된 스페인 국왕 자리를 놓고 다툼이 생긴 것이 도화선이 되어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승리는 준비한 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간섭과 영향력을 차례로 제거하고 1871년 4개 왕국, 18개 공국, 3개 자유시, 2개 제국령을 가진 역사적인 통일국가를 실현했다.  비스마르크의 모든 대외정책은 전략적·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장기짝을 옮겼다. 키신저는 저서 『외교(Diplomacy)』에서 “순간의 무드에 맞추고 전체 전략과 무관한” 지도자의 행동을 경계했다. 나폴레옹 3세는 외교적인 업적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다 실패했다는 키신저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 한·중·일 관계가 최악인 것도 세 나라 지도자들의 언행이 순간의 무드와 신문 제목과 저녁뉴스에만 맞춰지기 때문이다. 한·일 두 나라 정상들의 상대에 대한 언행이 특히 그렇다. 1890년 비스마르크가 현실주의외교(Realpolitik)라는 불멸의 모델을 남기고 퇴임할 때 유럽 언론들이 일제히 “수로 안내원이 배를 떠난다”면서 앞으로의 유럽 평화를 깊이 걱정한 것은 얼마나 교훈적인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