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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우리 역사 ③ 송파구 송파1동 행어사이공건창영세불망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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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송파근린공원에 세워진 ‘행어사이공건창영세불망비’

송파구 송파1동 송파초등학교 옆 근린공원 길가를 지나다보면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비를 볼 수 있다. ‘행어사이공건창영세불망비(行御史李公建昌永世不忘碑)’와 ‘을축칠월십팔일대홍수기념비(乙丑七月十八日大洪水紀念碑)’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두개의 비가 한 공간에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자가 조선시대 송파장의 흥했던 시기를 상징한다면, 후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송파장이 큰 수난을 겪었던 쇠퇴기의 모습을 대변한다.

 송파장이 흥했던 조선 말기는 다른 한편으로는 고관대작들의 매관매직과 수뢰, 착취로 인해 사회의 부패상이 극에 달했던 혼돈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기에 암행어사가 돼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어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이다.

 그는 김택영, 황현과 함께 조선후기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고종으로부터 당대 최고의 글꾼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강화학파의 마지막 효장이기도 하다. 1852년(철종3년) 개성에서 출생해 이조판서를 지낸 조부 이시원의 가르침 속에 강화에서 성장했다. 이시원은 1866년 병인양요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 아우인 이지원과 함께 나란히 자결했다. 몸소 우국충정을 보인 셈이다. 나라를 위해 초개(草芥)처럼 목숨을 버린 할아버지들의 강건하고 올곧은 선비정신은 어린 이건창에게 좋은 모범이 됐을 것이다.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던 이건창은 1866년(고종3년) 15세 최연소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한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해 19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에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돼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행을 낱낱이 파헤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으로 유배되는 일을 겪었다. 이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한동안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다시 관직에 나온 건 28세 되던 1880년이다. 고종의 간곡한 부름으로 경기도 암행어사가 돼 다시 민생을 살피는 일에 나섰다.

 그는 경기도 광주 일원을 돌며 관리들의 비행을 폭로했다. 또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민생구제에 힘썼다. 송파장에 와서도 신분을 속인 채 그곳 장꾼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에 앞장섰다. 아쉽게도 송파장에서의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1883년 5월 2일 그가 머물렀던 장터 입구에 주민들에 의해 공덕비가 세워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의 애민정신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는지 알 수 있다. 고종이 지방관을 보낼 때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일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높이 146cm, 폭 21cm의 ‘행어사이공건창영세불망비’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유실됐다가 1979년 어느 향토사학자에 의해 발견돼 송파여성문회회관 앞에 다시 세워졌다. 그 뒤 2009년 12월 송파1동 주민자치센터가 같은 자리에 신축되면서 바로 옆 근린공원으로 또 한 번 옮겨졌다. 공덕비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가족여행길에 우연히 강화에 있는 이건창 생가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소탈하고 검소한 작은 규모의 시골집을 보고 청빈했던 그의 면모에 다시 한 번 마음이 숙연해졌다. ‘어려운 시기에 큰 인물이 난다’고 한다. 이건창과 같은 반듯한 인물을 이번 대선에서 기대한다면 지나친 바람일까.

◆김경숙(52)씨는 2010년 송파문화원 박물관대학 수료 후 심화과정을 거쳐 송파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전시해설사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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