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애플 소송 배심원장 ‘삼성 협력사와 소송’ 전력 숨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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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삼성전자와 애플 간의 특허 소송에서 배심원 평결을 주도한 배심원장 벨빈 호건(67·사진)이 삼성전자의 오랜 협력사인 시게이트와 소송을 벌여 파산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드디스크(HDD) 제조업체인 시게이트는 지난해 말 삼성전자 HDD 사업 부문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진 건 삼성전자가 지난달 있었던 배심원 평결에 문제가 있다며 재판부에 신청한 ‘평결불복법률심리(JMOL)’를 통해서다. 삼성전자와 로이터통신·씨넷 등 외신에 따르면 삼성 측은 JMOL 신청서에서 호건이 시게이트와 소송을 벌인 적이 있는 만큼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가 된 소송은 1993년 호건이 시게이트를 사기 혐의로 고소하자 시게이트 역시 그를 맞고소한 사건이다. 호건은 80년대 시게이트에 취직하면서 콜로라도주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했는데, 콜로라도주에 있던 자신의 집 담보 대출을 시게이트가 나눠 갚기로 했다는 게 호건의 주장이다. 그러나 호건이 퇴직하자 시게이트는 그에게 대출금을 갚으라고 요구했고 이에 호건은 소송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호건은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개인 파산을 신청했다. 미국에서는 개인이 파산을 선언하면 재산 압류 등의 조치를 피할 수 있다. 호건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시게이트와 소송을 벌인 사실은 맞지만 배심원 선정 과정에서 연루된 모든 소송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라고 요구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법정에서 제출된 자료 외에 개인적 경험이나 법률 지식을 근거로 평결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는데, 호건의 이 같은 경험이 객관적 평결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됐다는 입장이다. 호건이 배심원장인 만큼 다른 배심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삼성 측은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삼성에 대해 애플의 디자인을 침해했으니 10억4934만3450달러(약 1조1910억원)를 배상하라고 평결한 직후 배심원 마뉴엘 일라건이 씨넷과의 인터뷰에서 “호건이 배심원들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지식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호건 역시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배심원은 선행 기술이 특정 기술의 특허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내가 배심원단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삼성전자는 특히 호건이 시게이트와의 소송을 숨겼다는 걸 문제 삼고 있다. 배심원 예비 심문 과정에서 재판장인 루시 고(43) 판사가 “본인이나 가족 또는 가까운 지인이 소송의 당사자나 증인으로 재판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질문했는데, 이에 호건이 다른 소송은 언급하면서 시게이트 소송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건이 재판부에 밝힌 소송은 창업했다 실패한 뒤 한 프로그래머와 소프트웨어 소유권을 놓고 벌인 2008년 소송이다.

 이를 토대로 삼성은 호건의 행위가 평결 자체를 무효화할 만한 ‘배심원 위법행위(juror misconduct)’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은 JMOL 신청서에서 배심원이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외부 지식을 활용했다가 문제가 돼 평결이 무효화된 사례를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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