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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하게 이어받으면 상무이사는 된다 그러나 사장 자리는 어림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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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대기업의 조직과 생리에 밝은 대선배를 얼마 전 만나 뵈었다. 여러 말씀 중 특히 공감되는 대목이 있었다. “대기업에서 착실하게 말 잘 듣고 능력 발휘하면 상무이사 정도까지는 될 수 있다. 사장 자리는 다르다. 베팅을 해야 한다.” 베팅(걸기)이란 대기업 오너의 지시에 맞서 자기만의 의견을 내는 일이다. 수동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목을 걸고 “이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라고 말하는 용기다. 오너가 이견(異見)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는지 내다보는 ‘감각’은 필수이고, 받아들여진 의견이 실제 성공으로 이어지는 ‘사후 입증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통하면 사장 승진이고 실패면 보따리를 싸야 한다.

 기업만의 일이 아니라고 본다. 베팅하는 용기는 모든 분야에 필요하다. 기업의 ‘오너 뛰어넘기’는 가정으로 치면 아버지 뛰어넘기이자 좋은 의미의 살부(殺父)의식 발휘다. 요즘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떠오른 가수 싸이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이유 하나로 너무너무 절실하게”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SBS ‘힐링 캠프-기쁘지 아니한가’). 그의 부친은 이북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다. 싸이가 대마초 사건으로 붙잡히자 경찰서에 찾아와서는 “이참에 담배도 끊으라우”라고 딱 한마디만 했다. 이때 싸이는 “이제 (나는) 아빠가 커버(보호)할 사이즈는 아닌 모양이다. 완전히 컸구나. 오늘 내가 아빠를 극복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싸이만의 ‘강남 스타일’은 아버지를 심리적으로 극복하는 순간 탄생했는지 모른다.

 그런 싸이를 스타 학원강사였던 이범(서울교육청 정책보좌관)씨는 저서 『이범, 공부에 반(反)하다』(2006년)에서 압구정동과 대치동의 문화 차이 맥락에서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압구정동·청담동 등 한강변 강남 북부 지역은 자수성가형 또는 상속형 부자가 많다. 대치동·도곡동 등 남부 지역은 전문가형 부자가 많고 대개 자기 세대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압구정동은 부모 또는 그 이전 세대부터 부유했던 가구가 많기 때문에 삶에 대한 태도가 좀 더 여유로우며, 그렇다 보니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싸이가 그런 경우다(싸이는 실제는 반포동 출신이지만 압구정 문화의 상징으로 차용했다고 이범씨는 밝혔다). 반면 대치동의 모범생 문화에서 의사·변호사는 많아도 싸이 같은 별종은 나오기 힘들다.

 어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과거사 공식 사과도 일종의 아버지 뛰어넘기다. 사(私)에서 공(公)으로의 전환이다. 다른 대선 주자들도 뛰어넘을 대상이 있을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넘어야 한다. 안철수 후보는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극복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넘겠다는 것인지 아직 모호하다. 이 베팅, 판돈이 엄청나다.

글=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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