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바짝 다가온 한국, 암과의 전쟁 벌여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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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스코틀랜드 광산 출신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목수 일을 찾아 남아프리카 낯선 나라에 둥지를 틀었다. 남아공 이주 후 흑백 인종차별을 보고 자란 백인 소녀는 ‘핍박 받는 흑인 여성들을 돕고 싶다’며 의과대에 진학했다. ‘좀 더 많은 환자를 돕는 길이 없을까’ 생각하다 제약업계로 옮긴 뒤 전설적 영업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세계 2위 항암제 업체 밀레니엄의 최고경영자(CEO)인 데버러 던샤이어(사진·49)의 약력이다.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골수종양 치료제 ‘벨케이드’가 그의 손을 거쳐 연매출 3조원대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거듭났다.

던샤이어가 지난 9일 1박2일로 처음 방한해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기자와 만났다. 부드러운 인상에 나긋나긋한 말투였지만 힘주는 대목에선 단호한 어조가 배어났다. 암이 인류의 주요 사망 원인으로 자리 잡으면서 암 치료제는 인류 건강과 장수의 구원자이자 블루오션 산업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만 한 해 19만 명의 암 환자가 발생한다. 한국인 4명 중 1명의 사망 원인이 암이다. 던샤이어 CEO는 “한국 환자에게도 최첨단 신약의 임상시험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암보다 똑똑해야 암 이긴다
-한국에 처음 왔는데.
“밀레니엄의 모회사인 일본 다케다의 한국법인이 출범한 것이 1년 전이다. 한국 업계와의 협력사업을 논의하고 지사 임직원들을 만나 긴밀히 소통해 보려고 서울에 왔다. 한국 등 아시아 지역 제약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암 치료제 분야는 더욱 그렇다. 밀레니엄(다케다 계열 항암 전문업체)과 한국의 협력이 긴요하다. 이곳 임직원들과 e-메일 같은 온라인 소통은 죽 해왔지만 직접 보는 것에 비할 수 없다. 열정이 넘치는 한국 지사와 직원들을 보니 흐뭇하다. 하루 정도 돌아다닌 서울 곳곳도 역동적인 분위기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쪽에 관심이 있나.
“우선 우리가 개발한 항암 신약들을 가지고 초기 임상시험을 해 봤더니 아시아인에게 효과적이었다. 일부 신약은 한국의 의료기관들과 중간 단계의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또 한국은 미국·유럽·일본처럼 고령화 사회에 들어섰다. 암 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높다. 앞으로 암과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암을 극복하려면 암보다 더 똑똑해야 한다. 세계적 항암 전문업체로서 더 똑똑한 약을 한국 환자들에게 베풀고 국가 보건의료 향상에 기여하고 싶다.”

-어떤 사업이 있을까.
“아시아인에 효과가 큰 폐암 치료 신약이 있다. 한국에서 임상시험을 추진 중이다. 지난 6월에는 골육종 치료제 ‘미팩트’가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허가를 받았다. 지난달에는 림프종 치료제 ‘브렌툭시맙 베도틴(성분명)’이 식약청의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됐다. 오늘 오후 출국 직전에는 삼성의료원과 협력사업을 논의한다.”

-개발 중인 신약들은 어떤 것이 있나.
“전립선암 치료제인 ‘TAK-700’을 비롯해 15개 파이프라인(신약군)을 보유하고 있다. 2016년까지 4~5개 신약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립선암 치료제인 ‘올테로넬’이나 폐암 치료제인 ‘모테사닙’ 등은 성공적 임상단계에 있다. 우리는 이들 신약군을 포함해 한국 암 환자들에게 우수 의약품을 공급하는 데 힘쓰겠다. 한국 의료계도 우리가 항암 분야의 글로벌 선두 회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러 암 환자에게 두루 효과가 있는 항암제는 없다고 하는데.
“맞다. 암은 맞춤형 치료가 효과적이다. 유전적 체질이 사람마다 달라 표적 치료법을 구사해야 한다. 많은 환자에게 적은 효과를 내는 치료제보다는 환자군은 작지만 효능이 있는 신약을 개발하겠다. 이를 위해 방대한 양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해 연구하고 있다. 인종에 따른 암 반응과 치료 효과 등 엄청난 데이터를 관리·분석하고 있다.”

-제약산업에 대한 한국 대기업과 정부의 관심이 크다.
“한국이 제약산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환자·기업·정부 모두에게 좋은 현상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새로운 성장산업이 되면 환자도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전자·자동차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에 오른 한국은 잠재력이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정도의 열정과 혁신 노력이 있으면 제약산업의 리더가 될 수 있다. 물론 제약 역시 연구개발부터 실적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끈기가 있어야 한다.”

-백인으로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개업의, 제약사 CEO 등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스코틀랜드 시골 광산 마을 출신인 부친이 목수 일을 찾아 아프리카 남부 짐바브웨로 이민을 갔다. 남아공에 정착하면서 요하네스버그의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개업의 시절 가난한 흑인 여성 치료에 힘썼다. 저항 운동가 넬슨 만델라가 1994년 첫 흑인 대통령이 되기까지 인종 차별의 현장을 많이 봤다. 제약업계로 인생 행로를 바꾼 것도 ‘의사 일보다 신약 개발이 좀 더 많은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약업계에 투신한 이후 큰 업적을 많이 냈다는데.
“운이 좋았다. 88년 스위스 노바티스(옛 산도스와 시바-가이기 합병사)에서 영입 제안을 받은 것이 행운이었다. 거기서 항암 부문을 맡아 북미 지역을 총괄했다. 항암은 떠오르는 분야였고 북미는 최대 시장이었다. 블록버스터급 신약이 된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의 마케팅을 진두지휘했다. 제약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려면 많은 사람의 땀이 필요하다. 회사의 연구개발·마케팅 등 모든 조직은 물론 병원 당국과 의사·환자에 이르기까지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96년 5000만 달러였던 노바티스 항암 매출이 10년 뒤 21억 달러로 불어났다.”

신약 실험실 들어서면 가슴 뜨거워져
-밀레니엄 CEO로서 회사가 일본 제약그룹 다케다에 인수될 때 기분이 어땠나.
“다케다의 인재 중시 철학을 믿었다. 밀레니엄의 기술이나 신약에만 욕심을 낸 것이 아니라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육성해 항암 전문회사를 키우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엄청난 돈을 들여 밀레니엄을 인수한 뒤 인재들이 예전처럼 동요 없이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줬다. 오히려 인재에 대한 지원이 더 늘었다.”

-도전적 인생에서 생긴 철학과 꿈이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늘 듣던 얘기가 있다. ‘어려운 경험들이 우리를 도전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교육이었다. 가난한 백인 집안에서 열악한 아프리카 이민 생활을 겪고 만델라 대통령의 인생 역정을 보며 자랐다. 그러면서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의지를 갖게 됐다. 그래서 나의 꿈은 암의 완전정복이다. 암의 생물학적 실체를 완전히 파악해 각 특성에 맞는 약물의 별자리를 그려낸 뒤 치료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 제약회사의 CEO를 넘어 인류 보건의료의 전도사로 일하고 싶다.”

-꿈을 이루려고 어떻게 하고 있나.
“수시로 실험실을 찾는다. 그곳에 가면 감정이 격해진다. 열정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신약 개발 현장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학계에서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지식이 인류 보건의료를 위해 제품으로 탄생하는 과정이다. 연구개발 투자는 아끼지 않는다. 매출의 20% 이상을 연구개발에 쓴다.”

-의사와 제약업자는 어떻게 다른가.
“개업의 시절에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집중했다. 제약 CEO는 모든 환자를 두루 봐야 한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의사와 제약 CEO 모두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신약이 개발되면 치료 효과만을 보지 않는다. 부작용이 얼마나 될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나은지 따져본다. 돈벌이에 몰두하면 안 된다. 의사처럼 환자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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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버러 던샤이어(Deborah Dunsire) 1963년 짐바브웨 출생으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메디컬스쿨(Witwatersan)을 나왔다. 개업의로 일하다 96년 스위스 노바티스에 항암 책임자로, 2005년 미국 밀레니엄에 CEO로 영입됐다. 의사 남편 사이에 14, 12세 두 아들이 있다.

밀레니엄(Millennium) 1993년 미 보스턴에서 출범한 암 치료 연구개발 회사. 아시아 1위, 세계 12위인 일본 제약사 다케다가 2008년 89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원호 기자 llhll@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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