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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자본시장통합법 통과 서둘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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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강창주
UBS글로벌에셋매니지먼트
싱가포르법인 상무

싱가포르 금융당국(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은 한국의 중앙은행(BOK)·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원 등의 기능을 합한 금융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다. 얼마 전 이곳에서 주관하는 자산운용업 종사자에 대한 자격시험에 삼수 끝에 합격하는 기쁨(?)을 맛봤다. 싱가포르의 자본시장법과 자금세탁방지법을 중심으로 출제되는데, 100문제 중 75개 이상을 맞혀야 합격할 수 있다.

 ‘금융상품 신문광고 시 상품 설명 문구의 폰트(글자) 사이즈는 얼마인가?’ 등처럼 교재를 읽지 않으면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대부분이다. 그간 현장에서 일한 경험에 비춰 상식 수준으로 답해선 정답을 맞힐 수 없다. 암기 실력이라면 어느 나라 사람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학력고사 세대’이지만 시험이 만만치는 않았다.

 MAS 자격시험이라는 게 싱가포르를 떠나면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암기한 지식은 시험이 끝나면 잊혀진다. 그런데 공부했던 것 중 하나가 선명히 기억에 남는다. 싱가포르 금융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MAS라는 조직의 설립 목적이다. MAS의 설립 목적은 ‘지속적인 성장과 더불어 금융센터 육성에 대한 지원’이다. 자본시장법 교재 첫 페이지에 나온다. 통념상 금융당국의 설립 목적에는 시장 안정, 성장, 선진화, 공정성 등과 같은 문구가 들어있을 것 같다. 그런데 싱가포르는 특이하게도 ‘금융센터 육성에 대한 지원’이라는, 감독기관으로서 후순위 목표 정도로 여겨지는 문구가 맨 앞에 나와 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116개의 외국은행과 129개의 자산운용사, 그리고 헤지펀드가 포함된 1000여 개의 금융 부티크(비제도권 투자자문사)가 싱가포르에 있으면서 MAS의 감독과 지원을 받고 있다. 이런 금융회사뿐 아니라 여기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계법인·법무법인·부동산회사 등과 같은 연관 산업까지 감안하면 싱가포르가 금융산업에서 창출하는 국부의 규모가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금융당국도 ‘동북아시아 금융 허브’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 세계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상장한 주식시장, 풍부한 시장 유동성, 세계적 수준의 정보기술(IT) 인프라 등이 갖춰졌다. 더불어 그간 영어 교육을 강조한 결과 지금은 어느 국내 금융회사를 가도 자유롭게 영어를 쓸 수 있는 젊은 인재를 만날 수 있다. 한국도 금융허브를 추진할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다만, 한 가지가 걱정이다. 의욕적으로 정책을 제안하는 금융당국이나 자본시장 업계와는 달리 법을 승인하는 최종 의결기구는 금융허브 추진에 미온적이라는 점이다. 최근 법안 통과가 늦어지고 있는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북아 금융허브 육성은 어느 한 기관이나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단지 ‘해 보고 싶다’거나 ‘하면 좋겠다’고 해서 추진하다가는 쓸데없이 국력만 낭비할 수 있다. 동북아 금융허브는 보편적인 공감대 형성과 함께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추진해야 한다. 동북아 금융허브를 이룩하기 위해 전폭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때다.

강창주 UBS글로벌에셋매니지먼트 싱가포르법인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