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빠순이’의 성장일기 ‘응답하라 199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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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기자가 된 건 8할이 ‘팬심’이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오빠’가 연예계 활동을 접고 유학을 떠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김포공항에 갔었다. 입국장 폴리스 라인 밖에서 몰려든 팬들과 발을 동동 구르던 중, 거침없이 오빠에게 다가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자연스레 오빠와 인사를 나누며 사진을 찍어대는 이들, 기자였다. 포장해 간 선물을 다시 들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결심했다. 기자가 되리라.

 요즘 20~30대 여성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케이블 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1990년대 후반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팬 문화에 주목한 드라마다. 97년, 아이돌 그룹 ‘H.O.T’ 토니의 팬으로 오빠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상경해 오빠의 집 앞을 지키는 ‘열혈 빠순이’ 시원(정은지)이 주인공이다. ‘H.O.T’와 ‘젝스키스’로 불타올랐던 아이돌 열풍 외에도, 삐삐·다마고찌·PC통신 등의 추억을 공유한 3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게 드라마의 세일즈 포인트.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는 유머러스한 에피소드 안에 열여덟의 소소한 열망과 좌절을 촘촘히 박아넣었다. 그 결과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모든 것을 걸었던” 그 시절을 따뜻하게 응시하는, 보기 드문 성장 드라마로 완성됐다.

tvN 화요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빠순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 ‘외로운 팬녀’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이 드라마가 팬심의 긍정적인 측면에 처음으로 주목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반에서 꼴등 하던 시원이는 아이돌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Fan+Fiction)을 쓰다 창작의 재능을 발견하고 작가가 된다. 사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명문대 철학과에 다니던 가수 신해철을 동경해 철학과에 가더니 박사까지 따버린 친구, ‘오빠들에게 저런 옷을 입히는 걸 참을 수 없다’며 패션에 탐닉하다 디자이너가 된 친구 등등. ‘오빠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 강렬한 열정 속을 헤매다,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찾아낸 바람직한 사례들이다.

 그러니 부모님들, 자녀가 아이돌에만 빠져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오히려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겐 “팬질 한번 해보렴” 권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하지만 늘 부작용은 있는 법. (누구처럼) 나이가 들어도 현실을 자각 못하고, 대상을 바꿔가며 끝 모를 팬질의 외길을 걷는 어른으로 자랄 가능성도 있으니 부디 그것만은 주의하자.